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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Jun 25. 2021

엄마의 시간 속에서 여성 개인은 길을 잃었다

70대 후반인 어머니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엄마로서의 삶은 만족하셨나요?"

"한 여성으로서의 삶은 어떠셨나요?"

물론 두 가지 모두 현실 속에서 묻기에는 대단히 쑥스러운 질문이다. 막상 중년의 아들이 이렇게 물었을 때 어머니는 어떤 생각을 하실까. 


"별 쓸데없는 소리 마라." 이러지 않으실까 싶지만.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하실 말씀이 많으실 터이다. 네 아이를 농촌환경에서 키운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성싶다. 부족한 것과 못 다해준 것, 서운한 것과 서러운 것들이 밀물처럼 밀려올 수도 있겠다. 반면 2남 2녀를 낳고 번듯하게(?) 키운 보람도 있을 터다. 자랑거리까지는 아니지만 최소한 걱정거리는 아니지 않은가.


어릴 때부터 봐온 엄마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다. 그 질문의 대부분은 어느 이른 아침의 기억들 속에서 피어난다. 지금도 이성적으로 깨어있기 힘든 새벽시간을 누구보다 일찍 시작했던 엄마의 시간들. 시간이 아무리 흘러가도 잊히지 않는 기억의 조각들이 남아있다.


일어나기가 죽기보다 싫게 느껴졌던 겨울의 새벽. 아무도 반가워하지 않는 바람은 유독 심술이 사나웠다.
자명종의 도움 없이도 어김없이 부엌 불은 켜졌다. 삼십 촉 백열전등이 흔들거리던 어둑한 공간에서 졸음을 참으며 쌀을 씻고 김칫국을 끓이던 부지런한 손길이 있었다. 손 시린 차가운 얼음물과 콧속까지 냉랭한 새벽바람은 누구에게도 달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그 한가운데 엄마가 서 계셨다.

찬물에 벌게진 손으로 안방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굴뚝에서는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랐다. 가족들의 아침을 깨우는 밥 냄새가 흘러나올 때 누군가는 엄마를 찾는다. 아이들의 세수를 위해 다시 물을 데우고 도시락을 준비하던 엄마의 손길. 그때는  몰랐다.

그 새벽과 손길의 의미를.


수십여 년 전 여느 집에서나 볼 수 있었던 풍경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의 어머니들은 거의 모두가 인내심의 끝판왕들이었다. 어쩌면 인내심이라는 글자만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엄마들의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애처로운 모습이 어머니들의 전부가 아니었다. 아이들과 남편 때문에 화내고 투정하고 짜증 내는 여느 사람들과 같은 캐릭터도 갖고 있었다. 커오면서 엄마에게 군밤과 등짝 스매싱을 당해보지 않은 이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특히 말썽 많은 아들들이라면. 삼십 대 엄마의 억센(?) 손길을 피해 할머니 뒤로 숨거나 담을 넘어 도망가버렸던 적이 한두 번이었던가.


삼십 대 혹은 사십 대의 엄마들의 십 대 아이들에 대한 대처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 세상살이가 조금 나아진 지금의 엄마들에게도 예전의 엄마들 못지않게 고민과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때의 아이들 못지않게 지금의 아이들 또한 엄마에게는 다양한 문제 뭉치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말씀을 하실까? 엄마로서의 삶이 아닌 한 여성으로서의 시간에 대하여...


아마도 첫 번째보다 훨씬 할 말씀이 더 많으실 터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인식이 형편없던 시절. 남녀 불평등이 당연시 여겨졌던 시절. 가정 내 독박 육아는 물론 시집살이가 기본이었던 시절. 그런 어둠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관념적 인식이 없다고 해서 불평불만이나 자신의 처지에 대한 생각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모두가 그러하니, 나 또한 그러하다"... 식의 자조 섞인 한숨만이 그 당시 엄마들의 사고를 지배하지는 않았을 터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엄마의 삶 속에서 한 여성으로서의 삶이 서로 균형을 맞춰가면 좋으련만. 그 밸런스를 찾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듯싶다. 그만큼 우리의 가정생활이 녹록지 않을 뿐 아니라 두 개의 차원에 대한 구분 자체를 인식하지 못해서 그럴수도 있다. 엄마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삶에 대한 준별이 뚜렷하지 않은 것은 아들이 어머니에게 쑥스러운 질문을 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측면이 아닐까.


엄마로서의 시간을 잘 지나면 한 개인으로서의 삶도 당연하게 잘 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우리 인간의 삶은 몇 막 몇 장의 연극처럼 구분되지도 않을뿐더러 논리적 인과관계나 자연계가 지배하는 순서가 없기 때문이다. 부모로서의 시간이 지나면 온전한 개인으로서 삶이 기다리지 않음에도 우리는 그것을 잊거나 외면한다. 아무리 착각은 자유라지만 이러한 불필요한 착각은 안타까울 정도로 영원히 지속된다.


한 가정을 꾸리고 한 여성과 함께 살아가는 이 시대의 아빠들은 엄마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질문 자체가 무리수다. 어쩌면 엄마의 마음을 헤아린다는(혹은 헤아리려 노력한다는) 것은 우주를 이해하고자 하는 과도한 욕망과 같다. 그래서 엄마들의 시간 선후에 대한 착각이 한편으로는 반갑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엄마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 엄마의 시간에서 자신의 길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성인 한 개인으로서 삶과 일상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결코 엄마나 아빠가 원하는 대로 자라지도 않을뿐더러 전생부터 쫓아온 채권자처럼 끊임없이 이유 없는 변제를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엄마로서의 차원과 한 여성으로서 층위를 의미 있게 분별할 수 있을 때 엄마의 일상도 평온을 찾아가지 않을까 싶다.


아이들이 지나치는 수많은 시험과 통과의례 속에서 엄마는 애간장이 녹고 여성 자신의 존재도 잃는다. 고3 아들의 원하는 대학 진학이나 취준생인 딸의 합격을 바라던 엄마들의 마음은 한결같다. 그들의 진학 실패와 불합격 소식에 엄마들은 자기 인생의 한 귀퉁이가 무너지는 절망감이 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아봐도 자기 위로에 불과해서 더 슬퍼지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엄마로서의 삶과 여성으로서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할 때 더 냉정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엄마로서 삶의 부담에서 가벼워질 때 오히려 여성으로서의 시간에 대한 애착이 강해지는 것은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길거리에서 지하철에서 아이들에게 큰소리로 소리치는 엄마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지나가고 있을 엄마들의 시간 속에서 상처 받지 않고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여성 개인의 시간도 차곡차곡 쌓아서 한참 후에 엄마의 시간 때문이라는 후회가 덜하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가득하다.


"모든 것을 다 살 수 있지만 시간은 살 수 없다." (영화 <라스트 미션> 중에서. 크린트 이스트우드)


이 문장은 아빠들이건 엄마들이건 마찬가지다. 누구에게나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가던 지나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시간. 어쩌면 여성 개인의 시간이 엄마의 시간 속에 휩쓸려 지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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