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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Jul 06. 2021

생각을 끄고 불안을 켜도 우리의 삶은 나아갈 것이다

어쩌면, 불안을 멈추다 보면 삶이 꺼질 수도

"우리의 삶은 불안을 떨쳐내고, 새로운 불안을 맞아들이고, 또다시 그것을 떨쳐내는 과정이다."

알랭 드 보통 <불안>


부엌에서 음식을 하거나 책을 읽을 때 라디오를 자주 듣는다. 듣기 좋은 음악과 적절한 멘트가 섞여 흘러나와 일종의 백색소음 역할을 톡톡히 하기 때문이다. 티브이 광고와는 달리 라디오 속의 광고는 모두 말로 전달된다. 말로 그려지는 물질의 입체화. 듣다 보면 머릿속에 동영상 하나를 띄워 놓는다. 어느 날인가부터 자주 들리는 문장이 있었다. 예전의 우황청심환과 비슷한 안정액이라는 상품의 광고 카피였다.


"불안을 생각을 켜다." (왜 그런지 몰라도 내 귀에는 "불안은 멈추고 생각을 키운다"로 의역되었다. 한편으로는 불안을 켜거나 끌 수는 있을까라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무언가를 콕 찌르는 문장이었다. 여러 기억과 생각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고시 공부할 때의 일화다. 경쟁이 치열한 시험을 앞두고 누구나 심란하고 조급 해지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다. 한 친구는 사법시험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는 걱정 탓에 잠 못 이루고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불안한 음에 그 당시 유행하던 우황청심환을 매일 한 개씩 복용하고 공부를 했다. 그 약발 때문인지 친구는 불안감과 초초한 마음이 없어지긴 했는데... 대신 공부할 마음 또한 사라지고 끊임없이 나른한 졸음이 찾아왔다고 한다. 어느 날은 이미 먹어버린 청심환을 내뱉기 위해 물구나무서기까지 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중3인 아들의 1학기 기말고사가 다가왔다. 아들은 매번 "다음 시험에는 제대로 준비를 해서 원하는 성적을 내겠다."라고 호언장담했다. 진정한 반성 없이 그냥 말로만. 아들의 마음과 행동은 나무늘보의 심성을 닮아가고 있었고. 이를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은 조급해지고 성마른 무언가를 닮아가고 있었다. 아들이 10대에서 느낄 수 있는 '불안과 걱정'을 가지지 못한 것을 기뻐해야 될지 비난해야 될지 모르겠다. 물론 시험기간 중 책상 위에는 에너지음료와 커피우유가 널브러져 있고, 아들은 자신의 이불 위에 비슷하게 엎어져 있다는 공통의 현상은 존재한다. 어쩜 저리도 세상을 편하게 살아갈까. 앞으로 모진 풍파가 몰아치는 경쟁상황을 어떻게 살아갈까. 아들은 다가오는 태풍에도 천하태평이고 부모의 마음은 불안함에 활활 타오르고 있는데...



안정액 존재가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삶은 "불안은 켜지고 생각은 꺼버린" 상태에 머무른 경우가 일상다반사다. 흔히 말하는 광범위한 스트레스로 표현되는 불안은 끊임없이 우리 주위를 맴돌며 일상을 파고든다. 시험을 앞둔 수험생이나 취준생을 포함한 평범한 이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마음속을 배회하는 불안의 존재를 느낀다. 물론 대부분의 불안감은 기우로 평가되어 사라질 운명이긴 하지만.


심지어 알랭 드 보통 같은 생각 많기로 유명한 이는 <불안>이라는 제목으로 책까지 내지 않았던가.(사실 그의 책은 흥미는 있으나 쉽게 읽히지는 않았다.) 그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 의식이 자율적인 사고를 하는 한 불안이 우리를 떠나간 적은 없다. 불안은 우리의 삶이 지속되는 한 남녀노소 불문하고 마음속 감정의 터줏대감으로 존재할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적당한 근심 걱정은 누구에게나 분명 약이 된다. 적절한 불안은 무언가를 미리 준비하는 동기부여나 인내의 뿌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어느 정도를 넘어설 때 독이 된다. 이미 각종 시험과 관계없는 성인들도 각종의 '자발적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다못해 운동에 대한 성취동기가 지나쳐 원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하거나, 독서에 대한 욕심이 많아져 진도가 나가지 않거나,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마음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이 또한 걱정 근심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를 불안케 하는 모종의 존재는 편재(遍在)하며 상존(常存)한다. 학생들은 공부와 성적에, 무주택자들은 부동산 시세와 소유의 부재에, 수험생들과 취준생들은 경쟁률과 불합격에, 재직자들은 불안정한 노동환경과 불안한 장래에, 건강하지 못한 이들은 각종 질병과 고통에,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은 삶과 죽음에, 미혼인 이들은 결혼과 홀로 있음에, 기혼자들은 결혼생활의 불안정과 그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그렇다고 부자들이나 건강한 이들이 걱정이 없을 리 없다. 가진 만큼 원하는 게 많은 만큼 불안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생각과 불안은 아름다운 장미를 비추는 한낮의 태양과 같지않을까. 불안은 생각을 존재하게 하는 힘이자 불가분적 요소로 상호 인과성은 크게 의미는 없다.

불안이 우리를 떠나지 않는 이상 불안이 주는 긍정적인 면을 생각해보면 어떨까. 때로는 그 느낌이 삶의 좌표를 설정해주거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주는 등대 역할도 해준다. 불안을 떠난 일상을 떠올릴 수 없다면 그것과 동거 동락하는 삶을 꿈꾼다면 어떨까. 불안은 멈춤으로써 생각은 커나감으로써 의미 있지 않을까 싶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관념적인 추론에 불과하다. 불안 속에 생각이 있고 생각의 내면에 불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생각의 본질이 불안이 아닐까라는 가벼운 의심도 해본다.)


더욱이 현대사회의 모든 인간은 알 수 없는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위험사회>를 저술한 울리히 벡(Ulrich Beck)에 의하면 이는 현대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다. 불안의 근저에 인간의 본능과 사회구조적인 차원이 결합되어 있다면, 이로부터 벗어난다는 생각 자체가 무리일 수 있다는 말이다. 저명한 벡 교수의 얘기가 아니더라도.


프레데릭 배크만의 <불안한 사람들>의 스토리에 의하면. 누군가의 삶을 따뜻하게 해 주는 것은 또 다른 누군가의 불안이다. 소설은 블랙유머와 개연성을 무기로 평범하지만 바보(?)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버무려낸다.  소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위의 평범한 이들이 가진 불안의 외피인 "아닌 척" 하는 것 때문에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마치 불안을 끄고 생각을 켜고 있는 것 같은 억지 제스처와 넘쳐나는 오지랖들. 그래서 우리가 세상과 주위 사람들과 사회문제에 대한 불안과 근심에 관한 촉각을 끄거나 멈춰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 삶에 대한 불안에 대해서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아무튼, 그런 시험을 무사히 통과해서 청년기의 불안을 벗어났던 친구는... 중년이 된 지금 여러 새로운 불안을 안고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 우리 집 중3 아들도 현재의 근심 걱정이 아니더라도 예상치 못한 여러 불안을 마주하고 살아갈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송곳 같은 문장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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