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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May 14. 2021

가족의 오월, SRT가 코로나의 심장을 갈랐다

간만의 사연 많은 귀향길이다. 삼십여 년이 훌쩍 넘는 서울 생활 동안 이토록 오랫동안 고향에 가지 못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여러 날 탁구대 위의 가벼운 공 같은 고민을 했다. 마치 어설픈 햄릿의 대사처럼. To go or not to go...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햄릿도 이러다가 두고두고 집에도 못 가고 우유부단함의 상징이 되었다는.)


밤늦게 막내와 함께 갈 수 있는 토요일 열차표를 예매했다. 그마저도 일주일 뒤의 토요일 오전 표. 무슨 일인지 특실표가 먼저 매진이었다. 비용보다는 밀집을 피해 안전을 추구한 결과일터다. 예매를 하다 보니 그때서야 작은 진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주말 기차표는 코로나 이전 이후를 가리지 않고 구하기  힘들다는 것을. 예전에도 결혼시즌과 관광철인 봄가을에는 한 달 이전에 미리 예매를 하지 않으면 원하는 시간대의 표를 구하지 못했다. 지금은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코로나로 인해 이동이 불편함 시절임에도 누군가는 열심히 고속열차를 이용하고 있었다. 우리가 너무 조심스럽게 살았나. 원인불명의  짜증보다 먼저 작은 회의가 들었다. 조금 더 과감하게 살아볼걸 그랬나.


년이 넘는 시간을 지나 이제야 목포행 고속열차에 올랐다. 작년 어버이날과 추석, 올해 설명절을 모두 건너뛰었다. 그렇다고 누가 누구에게 더 미안해하거나 부모형제들의 정이 사그라들지는 않았지만. 혈육들이 모이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쉬움이 컸다. 예정에도 없던 일 년, 가족모임 없는 잃어버린 500여 일이 지났다. 국가의 방역시책을 착한 학생처럼 따른 덕분이다. 지역 간 이동이나 노부모님들에게 더 위험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걱정이 앞섰던 까닭이다. 사실 충동의 개별성보다 계획적 집단성을 신뢰했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소수의 일탈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무단 횡단하는 이들에게 질서를 잘 지키는 이들이 소소하게 지고 사는 느낌이다.


인간이 살아온 어떤 시대에도 개인의 삶은 다중의 삶보다 빛과 어둠이 뚜렷했다. 그래서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의도를 무조건 책망하지는 말아야 함에도. 개인들의 불가피한 처지나 어쩔 수 없는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 속좁음이 답답했다. 하루가 여러 명암을 가지듯 우리의 사계도 낮게 깔린 암전(暗轉) 속을 지나고 있었다. 오늘은 온 천지가 황사 속에 갇혔고, 사람들의 세상도 여러모로 흐릿해졌다.



고속열차인 SRT는 출발시간에 맞춰 승객을 기다리고 있다. 자신의 역할은 고객의 안전과 편리함에 있다.


최고 시속 300km를 달리는 SRT는 사계절의 풍경과 원근법에 따른 하늘과 땅을 보여준다. 빛의 존재와 명암에 섬세했던 인상파 화가들이라면 저 산과  꽃과 나무들(濃淡)을 담을 수 있을까. 멀리 뿌옇게 찌푸린 산이 흘러 지나고, 가까운 강에는 하얀 백로(?)가 날개를 접었다. 들판에는 보리가 힘차게 고개를 들었고, 삽과 호미를 든 노부부가 들판을 걷고 있었다.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들은 이런 류의 상대성을 가진 것일까.


오월의 하늘은 특유의 색채를 잃어버리고 바래진 구름이 파스텔톤의 무늬를 만들었다. 멀리 산과 들판의 구분이, 논밭의 경계가 희미하게 흔들거리고, 더 가까이 전봇줄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새가 떼로  앉아 있었다. 수십 번 아니 수백 번도 넘게 이 길을 거쳐 남도로 향했음에도 풍경은 늘 다른 모습이었다. 눈 내린 산과 들이 그랬고, 이름 없이 피고 지던 꽃들이 그러하였으며, 한 개인으로 살다가 떠난 사람들이 그러했다. 완행열차와 급행열차의 시대를 지나 고속열차와 초고속열차의 시대에도 우리에게 보여지는 속도가 다를 뿐, 지나가는 모든 것들은 그렇게 지나갔고 지나고 있었다.


예전의 밤기차는 어둠의 소묘(素描) 속에서 나타샤의 시구와 러시아 실존주의 소설의 주인공들을 데려왔다. 희미한 전등 아래 졸음을 쫓는 이들에게 야간열차의 낭만을 선사했다. 삶은 달걀과 사이다와 병맥주의 콜라보가 비행기의 기내식 못지않은 만족을 주었던 그때. 8시간이 넘는 여정을 좁은 의자에서 두서너 명이 잘도 버티며 밤길을 이어 달렸다. 꿈꾸었던 로망이 막상 눈앞에 펼쳐지면 피곤함만 남는 헐거운 현실이었다. 다양한 들의 얘깃소리에 눈꺼풀은 한없이 무거워져 절로 흘러내렸다. 단풍잎 같은 차창을 달고 떠난다는 어느 시인의 시구가 떠올랐던 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 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 중에서.  



열차가 출발한 토요일 오전. 황사가 한반도를 뒤덮었고, 코로나의 공포는 우리를 주저함의 심연에 빠뜨렸다. 작년 2월부터 비롯된 두려움은 작은 일상부터 명절과 가족모임과 친구들의 만남을 삼켰다. 코로나라는 호흡기 질환은 일상을 잡아먹는 포식자였을까. 감염병으로 인한 우울은 누군가의 삼시세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럼에도 SRT가 출발하는 수서역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명절까지는 아니더라도 예전의 주말의 분위기 그대로였다. 어쩌면 이런 활기가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저런 활력이 우리가 평범한 삶 속에서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그전 같은 여행을 향한 들뜸과 소풍을 위한 먹거리는 보이지 않았지만. 탑승을 준비하는 이들의 눈빛 속에는 그리운 이들을 향한 설렘이 있었다.


오전 11시 정각. 수서역을 출발해 SRT는 곧장 도심구간의 지하세계로 빠져들었다. 열차는 천안아산역, 익산역, 정읍역, 광주송정역, 나주역을 거쳐 목포역으로 향하는 일정을 가졌다. 고속열차는 여러 도시와 산과 들을 지나 남으로 남으로 바르게 나아간다. 목적과 방향이 같다는 것은 기차여행의 큰 장점이다. 조용한 움직임 속에 예전의 거친 호흡을 가진 열차의 숨소리가 생각이 났다. 이제 SRT는 근사한 자태로 지치지 않는 심장을 가진 단거리 선수처럼 마라톤 평야를 질주한다. 낭만과 느림은 사라졌으되 여유와 시간이라는 큰 보상이 주어졌다.


익산역부터는 타는 이들보다 내리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열차 승강장에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가족들의 정다운 눈빛이 도열하고 있었다. 익산역이었던가. 젊은 부부가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나가자, 할아버지와 삼촌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할아버지가 두 팔로 손주 둘을 가슴에 안고 일어섰다. 혹시나 허리는 괜찮으실까 염려됐지만 아마도 기우였을 것이다. 어린 형제는 할아버지의 얼굴에 손을 부비고, 마중 나온 삼촌은 부부의 짐을 받아 들었다. 우리가 많이 보고 살았던 그런 살가운 풍경이었다. 그들의 정겨움이 황사를 밀어내고 창문을 통과해서 열차 안까지 들어왔다. 보기만 해도 따뜻함이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정읍역에서는 캐리어를 끌고 나가던 젊은 여성을 모녀로 보이는 이들이 맞아주었다. 정오의 태양 아래에서 언니가 동생을 껴안자, 반가움의 공간 속에서 시간이 멈추었다. 그들의 마스크 속 얼굴은 보여질수 있는 한 가장 환한 미소를 내보이고 있었다. 등을 두드리는 저 손길은 카톡을 보내던 그 손이건만, 지금은 애정과 인간의 체온이 닮겼다. 우리 언니... 동생... 이들의 상봉과 포옹은 얼마만일까. 그들의 만남은 자매의 관계가 어떠했을까를 보여주고 있었다. 붉은색 캐리어는 엄마의 손에 이끌리고, 사이좋은 자매는 손을 잡고 플랫폼을 떠나고 있었다.


고향 가는 이들의 손에는 여러 색상의 카네이션과 다알리아와 장미가 흔들거렸다. 기차는 황사의 심장을 가르고, 익숙한 풍경 속으로 들어왔다. 진즉에 몇 번을 돌아봤어야 될 공간이었지만 시간(혹은 마음의 여유가)이 허락지 않았다. 아니 우리 안의 두려움이 게으름이라는 변명을 소환했을지도 모르겠다. 승강장에서 가족을 기다리는 조바심은 코로나를 뛰어넘고, 아이들과 할머니의 웃음 속에서 나쁜 기억은 생명을 다할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왜 지루한지 이제는 알겠다. 타인들의 삶과 회한, 시간이 세상에 부여하는 의미를 설명하는 것은 그 자체로 어려워서가 아닐까.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서로 잃어버린 시간의 궤적은 다르겠지만. 양자 간에 잃어버린 시간의 질감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떤 소설의 시작은 끝에 놓여있었다'라고 말했던 들뢰즈의 문장처럼, 우리의 삶도 그 시작은 결국 끝에 놓여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인간의 과학기술이 코로나의 심장을 제대로 가를 날이 올 것이다. 비록 오늘은 황사가 우리의 앞길을 불투명하게 할지라도 고속열차의 힘을 빌어 그 심장을 꿰뚫고 지났다. 아이들의 손에 담긴 꽃향기가 가족들이 그리워하는 오월을 다시 불러오고 있었다.


이 SRT 의  마지막 도착지는 호남선의 종착역인 목포역이다. 2시간 20여분 동안의 여행끝에 열차는 몇시간의 휴식을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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