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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상열 Aug 14. 2021

하필이면

97학번으로 인터넷과 핸드폰이 이제 막 태동하던 시절에 대학에 들어갔다. <우리들의 천국>, <내일은 사랑> 등 청춘 드라마가 인기있던 시절이었다. 대학에 들어가면 그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들처럼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들었다. 여자친구를 만들기 위해 많은 시도를 했다. 그 당시 가입했던 동아리 동기 한 명이 자신의 고등학교 친구들을 소개시켜 준다고 하길래 냉큼 따라나갔다. 남자 4명과 여자 4명의 미팅이었다.   

   

5월의 어느 멋진 봄날 신촌 카페에서 8명이 마주보고 앉았다. 아직 여드름이 가시지 않는 거친 얼굴이 신경쓰였지만, 최대한 내가 꾸밀 수 있는 옷을 차려입고 나갔다. 사실 그 당시 나는 패션테러리스트에 가까워서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유행했던 드라마가 배우 차인표와 안재욱, 최진실이 나온 <별은 내가슴에>였다.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던 안재욱을 따라한다고 머리 하나 내리고 셔츠를 즐겨 입었던 듯 하다. 아마 그 날도 그렇게 비슷하게 나갔다.      


나온 여대생 중에 한 명이 맘에 들었다. 저 친구와 꼭 되고 싶어 여러 노력을 했지만, 실패했다. DJ DOC의 <머피의 법칙>에 나오는 가사처럼 “하필이면” 그 중에 제일 맘에 안 드는 애랑 파트너가 되었다. 미팅이 끝난 이후 내 얼굴은 내내 굳어 있었다. 그 표정을 본 내 파트너 그녀는 화를 내고 먼저 집에 갔다.     

 

위에 언급한 “하필이면”의 뜻을 잘 설명한 글이 있다. 장영희 교수가 어떤 에세이 글에 잘 나와 있는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하필이면 이란 말은 ‘왜 나만?’ 이라는 의문을 전제로 한다.”     


공감한다. 나는 죽어라 노력해도 안되는 일 투성인데, 남들은 그다지 노력하지 않아도 다 잘 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많은 사람들 중 하필이면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지 늘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히고 억울한 것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태어나 보니 금수저인 사람도 있고, 흙수저로 살아가기도 한다. 이분법적으로 꼭 나누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이런 운명의 불공평이 야속하다. 왜 하필이면 그 대상이 내가 되어야 하는가? 이런 생각으로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대학원과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형편이 어려워서 선뜻 부모님에게 그 학비까지 내달라고 말하진 못했다. 다른 동기들은 빵빵한 부모의 지원 아래 하고 싶은 것을 다하고 사는데, 왜 “하필이면” 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에 의기소침했다. 이 단어가 이리 나에게는 서글프고 한심하게 느껴줄 줄은 몰랐다.    

  

그렇게 10여년이 지나 31살이 되었다. 어느 작은 설계회사 대리로 열심히 근무하던 시절이다. 상사에게 혼도 많이 났지만, 4년차 직장인이 되다보니 일도 익숙해졌다. 나름대로 일머리도 생겨 업무에 능동적으로 임하기도 했다. 그렇게 1년을 열심히 보냈더니 상사가 나를 부르더니 대뜸 축하의 말을 전한다. 축하받을 일이 없는데 무슨 소리냐고 물어봤더니 우수사원에 뽑혔다고 한다. 그 많은 직원 중에 “하필이면” 내가 뽑힌 것이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내심 기분이 좋았다. 1년 동안 열심히 일한 댓가를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좋은 상황에  “하필이면”을 가져다 쓰니 앞에 쓰던 의미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일을 잘하는 상사도 많은데 “하필이면” 내가 받았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렇게 따져보니 나도 가진 게 많았다. 아직 건강한 부모님이 계시고, 결혼도 해서 아내와 아이들도 있다. 졸작이지만 출간한 여러 권의 책도 있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나도 분에 넘치게 그보다 덜 살고 있는 것에도 감사하다. 

    

“하필이면” 하나 단어로도 나쁘게 또는 좋게 해석될 수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왜 나한테만 이런 시련을 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거꾸로 더 많은 사상자가 나오는 다른 나라보다 “하필이면” 안전한 우리나라에 있는 것이 다행일지 모른다. “하필이면” 오늘이 내 일생에서 가장 좋은 날이 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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