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상열 Jan 18. 2024

사람은 각자 말하지 못할 사정은 하나씩 있다

작년 연말 오랜만에 30년 지기 초등학교 동창 한 명에게 연락이 왔다. 안부도 물어볼 겸 얼굴 본 지 오래되어 한 번 모이자고. 평소 같았으면 당장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알려달라고 했을 텐데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다. 단톡방에도 시간과 장소가 공지되었다. 친구들끼리 활발하게 소통했지만, 참여하지 못했다. 아니 참여할 마음이 없었다. 평소 대화에도 잘 참여했던 내가 보이지 않으니 친구들도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했나 보다. 한 친구가 나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그냥 좀 안 좋은 일이 있어 머리가 복잡하네. 상황이 좀 좋아지면 다시 이야기할게.”     


이 정도로 답장을 보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잘 해결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같이 전했다. 친한 친구들에게 다 말하고 싶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내 속내를 다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구구절절 말해봐야 그들에게 위로는 받겠지만 실질적으로 나를 도와줄 방법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2030 시절에는 무슨 고민이 생길 때마다 지인이나 친구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사정까지. 특히 회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그 안에서 친해지게 된 사람에게까지 시시콜콜 이야기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것이 나중에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이야기했던 정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아졌다. 비밀은 없었다.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나를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이 달라졌다. 매사에 불평많고 욱하는 직원이 되어 있었다.    

  

작년 11월 7년 넘게 다니던 전 회사에서 비자발적인 퇴사로 나오게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면서 새 회사 좀 알아봐 달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이런 사정을 다 말하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 굳이 먼저 이야기하지 않는다. 좋은 소식도 아니다 보니 오히려 더 숨기고 싶었다. 침묵하면서 차분하게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친한 지인에게 이야기해도 그만이었다.      

어느 날 한 지인과 술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긍정의 아이콘이자 항상 웃는 얼굴로 다니다 보니 모임에서도 굉장한 인기를 누리는 사람이다. 그를 볼 때마다 어떻게 저렇게 항상 밝게 살 수 있을까 부럽기도 하면서 궁금했다. 주변에 늘 사람이 많고, 하는 일마다 승승장구 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걱정없이 멋지게 산다고 감탄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 날따라 만난 그는 다른 모습이었다. 술이 몇 잔 들어가자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웃고 있지만, 정말 기분이 좋아서 웃는 모습이 아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조심스럽게 술 한 잔 따르면서 물었다. 오늘 따라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인다고. 그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사실 오랫동안 말하지 못한 사정이 있어요. 왜 누구나 하나씩 있잖아요?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이 있다고. 제가 사실 아이가 하나 있는데, 많이 아파요. 이혼하고 혼자 키우고 있는데, 아이 엄마에게 아직 그 말을 전하지 못했어요.”     


이혼했다는 것도 몰랐다. 아이 엄마에게 이야기는 해줄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혼한 아내도 이젠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서 전할 수가 없었다고. 이혼했지만 전 아내의 장례까지 본인이 손수 마무리했다고 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술 먹다 보니 별 이야길 다 한다고 웃으면서 그래도 이야기하고 나니 속은 좀 후련하다고 했다.      


겉으로 밝아 보인다고 그 속까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사람은 누구나 말하지 못할 사정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그 사정까지 알 필요 없지만, 그래도 한 번 알게 된다면 한 번쯤 들어주면서 같이 공감하고 위로는 해줄 수 있지 않을까? 나도 그냥 친구들에게 모임에 나가서 이런 상황이란 것을 속 시원하게 다시 털어놓았다면 좀 더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까?   

   

모순이다. 그 사정을 다 말하는 것도 또 말하지 않고 끝까지 감추는 것도 무엇이 좋은지 잘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말하지 못할 사정을 먼저 타인에게 구구절절 말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다. 필요할 때 사정을 이야기한다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도와줄지 모르니까. 침묵과 적절한 선택이 때로 인생을 좀 더 현명하게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한다.      

#누구나말못할사정은하나씩있다 #감정 #사정 #걱정 #직장인글쓰기 #글로옮기지못할삶은없습니다 #닥치고글쓰기 #인생 #라이팅 #인문학 #마흔이처음이라 #당신만지치지않으면됩니다 #자기계발 #에세이 #단상 #황상열 #황상열작가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은 혹시 타임 푸어입니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