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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상열 May 01. 2020

할아버지의 돈


2017년 가을 친할아버지가 90대 중반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성인이 되어 할아버지를 자주 찾아뵙지 못했지만, 어린시절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많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셋째아들이다. 10대 나이에 수재 소리를 들으며 혼자 서울로 올라와 학교를 다녔다. 나는 그 당시 유일하게 서울에 사는 손자였다. 공부도 곧잘 하다보니 할아버지에게 자랑거리였다.     


명절과 아버지 회사의 휴가를 이용해 할아버지가 계신 시골 큰집에 갔다.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내외가 살고 있는 집이다. 경상북도 영주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시골마을에 위치해 있다. 주변을 둘러봐도 산과 들 밖에 보이지 않는다. 큰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소를 키우고 농사를 직접 지었다. 집안에서 유일한 도시 남자였던 아버지와 내가 내려가면 할아버지는 대문부터 뛰어나와 반겼다. 할아버지가 계신 사랑방에서 잠도 당연히 같이 잤다.  

   

서울로 돌아가는 날이면 항상 도포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몇 개의 만원 지폐를 내 손에 꼭 쥐어주셨다. “공부 잘하고 필요한 것 있음 사거라. 또 놀러오고.” 그렇게 고등학교 1학년 시절까지 시골에 갈 때마다 단돈 만원이라도 챙겨주신 할아버지다.     

성인이 되고 한동안 찾아뵙지 못했다. 아버지와의 반목으로 결혼 전까지 명절때도 시골에 가지 않고 서울에서 혼자 지냈다.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등 친척 어르신에게도 인사하지 않는 불효자였다. 부모님 얼굴에 먹칠을 제대로 했다. 오지 않는 나를 할아버지는 많이 기다렸다고 나중에 들었다.     


결혼하고 아내와 처음으로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렸다. 근 10년만이다. 오랜만에 본 할아버지의 모습은 어린 시절에 봤던 그 모습과 별다를 게 없다. 세월의 흐름에 좀 더 늙으신 것을 제외하면. 인자한 미소로 나를 반겨주셨다. 이제 30살이 넘은 성인인데, 아직 할아버지가 보기엔 철없는 손자인가 보다. 다시 도포 주머니에서 만원 한 장을 건네주시는데,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이것으로 필요한 거 사거나 맛있는 거 사 먹어라.”    


이후로 매년 명절 때마다 거르지 않고 할아버지를 뵈러 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눈도 잘 보이지 않고, 허리도 많이 굽으셔서 제대로 펴지도 못한다. 그래도 청각은 정상이라 목소리를 듣고 내가 왔는지를 확인한다. 할아버지 앞에서 큰 절을 드리고 인사를 하면 잘 보이지 않으셔도 또 돈을 꺼내어 내 손에 꼭 쥐어주신다. “이것으로 필요한 거 사거나 맛있는 거 사 먹어라.”    


그리고 돌아가시기 3년전 부터 요양원에서 기거하시다 이 세상을 떠나셨다.    


연휴 시작이라 오랜만에 부모님을 뵈러 광명 본가에 왔다. 문앞부터 아버지가 아이들을 반갑게 맞아주신다. 그리고 아이들이 인사를 하니 꼬깃꼬깃 지폐 몇장을 꺼낸다. 아이들의 손에 쥐어주면서 한 마디 하신다.  “필요하거나 맛있는 것 사 먹어라.”


짐정리하다 그 목소리를 들었다. 나의 아버지도 이제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 모습에 할아버지가 겹쳐보인다.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     


“할아버지, 주신 돈으로 맛있는 음식과 필요한 책 잘 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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