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상열 Aug 29. 2020

그녀의 독백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3~4년이 지나니 업무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그러나 계속된 야근과 밤샘근무, 발주처 직원과 지자체 공무원의 갑질 및 상사의 계속되는 꾸지람 등으로 인해 내 정신과 육체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쌓여가는 스트레스와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해 매일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퇴근이 가까워오면 전화번호 리스트를 보고 오늘은 어떤 사람을 만날지 체크했다. 오늘 만날 그 사람에게 하소연이라도 해야 마음이 좀 풀릴 것 같아 시간이 되는 사람들을 찾을 때까지 연락했다.      


그러나 매일 약속이 잡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들 먹고 사는게 바쁘고 각자의 생활 스케줄이 있는 게 첫 번째 이유요, 매번 만날 때마다 징징대는 나를 더 이상 받아주기 싫어 피하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술 한 잔 기울이면서 사람들과 대화하는 자리가 좋았다. 그러나 상대방의 이야기는 들어주지 않고 내 이야기만 늘어놓으니 다음에 다시 만나자고 하면 연락을 받지 않는 사람이 많아졌다.      


더 이상 부를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아야 스트레스가 풀렸다. 지치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때마다 털어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쌓이고 쌓이다가 한번 폭발하면 혼자 술을 마시는 날도 많아졌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애인도 없었던 터라 야근하고 나오면 허전하고 외로웠다.      


그 날도 회사에서 야근을 마치고 나오니 오후 10시 정도였다. 빨리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야 하는데, 맥주라도 한 잔 마시고 싶었다. 그 날 오후에도 상사에게 엄청나게 깨지고 혼나서 그냥 가기가 싫었다. 같이 퇴근하는 동료를 억지로 데리고 맥주집으로 들어갔다. 시원한 500cc 맥주와 마른 안주를 시켰다. 아무 말 없이 500cc 맥주 한 잔을 다 마신 동료는 피곤하다는 말과 함께 바람처럼 사라졌다.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두고.     

 

혼자 맥주집을 나오는데 맞은 편에 상사가 가끔 데려갔던 모던 바가 있었다. 바텐더가 칵테일도 제조하고 위스키를 파는 일반적인 술집이다. 집에도 가기 싫어 그 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정이 넘은 시각. 이미 집에 가는 지하철은 끊겼다.      


술집으로 들어가니 처음 보는 바텐더가 있다. 나를 알아보는 사장님이 아르바이트로 새로 왔다고 소개한다. 그 바텐더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안녕하세요! 무엇을 드릴까요? 피곤해 보이시네요?”

“네. 안녕하세요. 계속되는 야근으로 너무 피곤해요. 야근만 해도 힘든데 업무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요. 하하하. 병맥주 하나 주세요. ”

“힘내세요! 여기 한 병 드릴게요.”

“처음 오셨나 봐요.”

“네. 대학 졸업반인데 아르바이트도 할 겸 해서 왔어요.”

“아, 취업준비 하면서 밤에 알바까지 하려면 힘들겠어요.”

“괜찮아요. 할만해요. 신경써주셔서 감사해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웃고 있지만 표정은 슬퍼 보인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회사 일이 힘들다고 징징대는 나를 그녀는 묵묵히 들어주고 있었다.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힘들고 지친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기분도 상쾌했다. 내 말을 다 듣고난 그녀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너무 징징대지 마세요. 그래도 손님은 부모님도 계시고, 어엿한 직장인으로 사회생활도 멋지게 살고 계신 거 같은데요? 제가 제일 부러워하는 환경에서 잘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뭐가 그리 인생에 힘들어 하시는지.”

“그렇게 보이세요?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리 함부로 말합니까?”     

순간 욱했다. 처음 본 사람이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반문했다. 내 속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아. 죄송해요. 화나게 하려고 했던 건 아니구요. 제 상황이 좀 서글퍼서요. 부모님은 이미 오래전 돌아가시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이 하나 있는데, 매일 사고를 치네요. 부모님 이름으로 빚이 몇 억이 있는데, 그걸 다 갚아야 해요. 낮에도 과외 2개, 밤에 바텐더 알바를 해도 남는 게 없어요. 저는 사는 게 너무 팍팍해서 손님의 고민은 사실 잘 들어오지가 않네요.”

“죄송합니다. 역시 사람은 이야기를 들어봐야 그 사람에 대해 알게 되네요.”

“그냥 아직 어리지만 건강하게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고, 이렇게 몇 년간 고생하면 좋은 날이 오지 않을까요?”     

순간 뒷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그 바텐더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뭐라고 반박할 여지도 없었다. 그 말을 하면서 울지도 않고 씁쓸한 미소를 짓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오히려 내가 더 눈물이 나왔다. 맥주 한 병을 더 마시고 그녀의 손에 몇 만원 팁을 쥐어 주고 나왔다.      


지금도 인생이 힘든 순간마다 그날밤 바텐더의 말이 떠올리며 힘을 낸다. 이 세상에 알고 보면 인생을 더 힘들게 살면서도 묵묵히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도 많은데. 가끔 나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선 까맣게 잊고 지내는 듯 하다.     


13년이 지난 엊그제 밤 퇴근길에 우연히 그 바를 지나가게 되었다. 참 열심히 사는 그 바텐더는 이제는 빚을 다 갚고 행복하고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녀의독백 #인생이란 #불공평 #희망 #인생 #인문학 #글쓰기 #글 #라이팅 #자기계발 #에세이 #단상 #황상열


매거진의 이전글 악플은 이제 그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