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은 제자리를 맴돌고...
'멀리 있는 빛'에 이어서...
아침에 나선 바닷가 마을은 한적했다. 하늘은 맑았고, 바다는 반짝이고 있었다. 지난밤에 이미 한번 들러 보았던 대변항을 지나 기장으로 향했다. 해안도로를 따라 계속 거슬러 올라가고자 했다. 기장 시내로 들어서면서 살짝 낯선 기분이 들었고 나는 가능한 한 빨리 다시 해안 도로로 접어들고 싶었다. 버스 정류장이나 길 중간중간에 인근 약도가 보이면 한창을 들여다 보고, 이정표도 유심히 보면서 길을 찾았다.
그래서 향한 곳이 죽성리였다. 생각보다 먼 길이었는데, 바닷가라기보다는 산속 같은 기분이었다. 길 옆으로 드문드문 인가가 있었는데, 빈 집도 자주 눈에 띄었다. 머리 속에서는 계속 미생과 완생의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고, 나는 지금 어디쯤에 서 있는 것인지 생각했다. 걷는 길이 길어질수록 생각과 현실은 하나가 되었다. 어디쯤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가 지금 걷고 있는 길을 말하는 것인지 나의 시간을 말하는 것인지 헷갈렸다. 한 순간 죽음도 두렵지 않다고 했음에도, 틈만 나면 되살아나는 두려움이란... 징글징글하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면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는 속담이 주는 원래의 교훈과는 상관없이, 사람의 본성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건 그 사람의 이성적이지 못하거나 배은망덕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가장 먼저 나탈 수밖에 없는 본성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체로 우리는 그런 상황에 잘 대처하지 못한다.
죽성리에 다다르니 다시 바다가 보인다. 바닷가 돌 위에 있는 죽성 성당(실제 성당이 아니라 드라마 촬영 세트)을 지나 다시 해안 도로를 걷는다. 처음에는 그것이 역방향인지 몰랐다. 그저 맨 처음에 정한 길을 따라 걸었기 때문에 난 그것이 북쪽으로 올라가는 과정이라고만 믿었다. 가끔 이리저리 걷다 보면 동서남북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도 많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바다가 왼편에 있다는 점이 찜찜했다. 결국 그 해안도로를 걸어서 도착한 곳은 다시 대변항이었다. 길은 좋았지만, 나는 어느새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동안 나를 속여왔던 것은 무엇인가? 무언가 잘못되었을 때, 가장 먼저는 밖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사람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고, 상황 탓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크게 나를 속인 것은 '믿음'이다. 애초에 나를 걷게 만든 것도 믿음인데... 그렇다면 믿음에도 좋고 나쁨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잘못된 믿음'을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을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목적 지향... 우리는 그렇게 길들여져 왔다. 목적이 있어야 한다. 혹은 목표가 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목적이 없는 상황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애당초 나는 방황을 하고 있었고, 어디로 가든 상관이 없었음에도 은연중에 목적지를 만들어 놓았다. 목적이 생기니까 자연스럽게 성공이나 실패를 나눌 수 있게 되고, 그 결과에 따라 믿음도 잘된 것 잘못된 것으로 나뉜 것이다.
아직도 나는 모르겠다. 그런 목적을 가져야 하는 것인지... 과연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이 어떤 목적이 있어서였는지... 다만 방황을 할 때는 그저 방황을 하는 것이 좋겠다. 세상은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원래부터 그랬다.
다시 대변항으로 돌아온 나는 결국 버스를 타고 기장역으로 갔고, 동대구에 내렸다. 화본역으로 갈려고 했는데, 막차가 떠난 지 30분 정도 지났다. 다시 부랴부랴 버스 편을 알아 보고 북부 터미널에서 버스를 탔다. 모든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불편했다. 휴대폰 하나면 금방금방 찾아낼 것을 창구에서 물어보고, 관광안내소에서 물어보고, 지도를 보고 해도 불확실한 것 투성이었다. 확실히 기술은 사람을 편하게 하는 만큼, 어떤 사람은 굉장히 불편하게 만든다.
결국 그날 밤. 깜깜한 산골 마을 어딘가에 내려, 산기슭에 있는 으슥한 모텔에서 천장을 가로지르는 대들보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잠들었다.
The pain I feel now is the happiness I had before. That's the deal. - C.S. Lewis
But not for me (by Chet Baker): 3분 4초
작곡/작사: George Gershwin, Ira Gershwin
현대음악사에서 전방위적인 장르에서 천재성을 보여준 조지 거쉬인의 곡이다.
이 곡은 1930년 뮤지컬 Girl Crazy중의 한 곡이다. (이 뮤지컬은 1992년 Crazy for you로 재탄생한다.) 해서 원래 가사에는 앞부분이 있는데, 보통 팝/재즈 곡에서는 'They're writing songs of love~'라는 부분에서 시작한다.
이 곡의 오리지널은 1930년 당시 Ginger Rogers이지만, 유명한 것은 1959년 엘라 피츠제럴드 (Ella Fitzgerald)의 앨범 'Ella Fitzgerald Sings the George and Ira Gershwin Songbook'에서 엘라가 부른 버전이다. 이 앨범은 LP 시절에는 총 5장, 후에 CD로는 4장짜리로 발매되었는데, 말이 필요 없다. 그냥 들으면 된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보컬이라서 겨울 즈음에는 이 앨범 하루 종일 돌려놓기도 한다. 다만 다른 곡들도 많기에... 이 곡을 위해서는 쳇 베이커(Chet Baker)의 버전을 골랐다.
쳇 베이커(Chet Baker)의 곡은 1954년(엘라 피츠제럴드 보다 먼저다) 'Chet Baker Sings'앨범에 첫 번째 곡으로 발표되었다.(후에 1956년 재발매 LP에서는 B면 첫 번째. 전체 7번째 곡이다.) 이 앨범은 쳇 베이커의 보컬 데뷔 앨범이다. 쳇 베이커는 유명한 재즈 뮤지션으로 트럼펫과 플루겔 혼 연주자로 유명한데, 1950년대에 보컬로도 많은 찬사를 받았다. 목소리가... 지금의 아이돌 같은 느낌이 든다. (뭐하나 빠지는 게 없다는...)
아주 오래전에 후배에게서 쳇 베이커의 CD를 선물로 받은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바로 그 느낌... 너무 달짝지근해서 크게 좋아하지는 않았었는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