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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ke Aug 17. 2018

찬 바람이 불면

점점 힘들어지는 여름 나기

오늘 밤은 바람이 선선하다. 다른 동네는 모르겠는데, 산자락에 있는 이 동네는 대체로 8월 15일이 지나면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더위에 정신 못 차리는 와중에서 8월 15일만 지나길 손꼽아 기다렸는데, 다행히 오늘 저녁에 선선한 바람이 분다. 이제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바람소리, 나무 소리가 오래된 친구를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갑다.


그래도 겨울보다는 여름이 낫다고 생각했었는데, 오산이었다. 도무지 제정신을 가누지 못할 만큼 엉망진창이 되었다. 게다가 냉방병 때문에 콧물은 끊이지 않고, 두통은 멈추지 않고, 뜨겁게 달궈진 옥탑방에는 한쪽은 뜨거운 기운이 한쪽은 냉기가 돌아 몸은 계속 혹사를 당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목이며, 무릎이며 관절은 제 멋대로 에 속은 계속 좋지 않고, 배는 점점 더 불러와 이제 만삭에 가까운 수준이 되었다. 여름은 더워야 제 맛이라고... 하는 소리는 이제 폐기해야겠다.


지난 한 달 동안 동네 밖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는데, 몇 번 꼼짝을 해야지 마음먹었다가도 입안으로 직접 치고 들어오는 더운 공기를 마시면 다시 돌아올 일이 까마득하게 느껴져 엄두도 내지 못했다. 멈춰진 시간... 멈춰진 행동, 멈춰진 생각... 


올해가 역대급 더위라고 하지만 사실 작년 여름, 그 전 여름도 마찬가지였다. 입에서 단내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면 우린 지나간 것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다. 죽을 거 같은 고통도 지나가 버리면 추억이 되고, 그 시간을 견뎌냈다는 자부심 같은 것도 생겨나 자연스럽게 지금의 가치를 더해준다. 어찌 보면 참 단순한 삶의 방식이다.


지난 것에 대한 관대함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차라리 아무런 가치 판단 없이 그대로 두었으면 좋으련만, 지나간 것을 그대로 두지 않는 것 또한 매번 반복되는 일이다. 그래 그런 것.... 우리 일상이란 별것 아닌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또 일상을 채우는 데는 그런 별 것 아닌 것들이 제격인 것 같다.


여름이 더웠으니, 또 겨울은 더 추워지겠지. 그만큼 겪었으니 잘 알면서도 매번 처음인 것처럼 새롭다. 지나가 버리면 쉽게 잊히기도 한다. 어쩌면 남아 있는 기억에 대한 관대함은 그런 잊힘 속에서 살아남은 것에 대한 보상일지도 모르겠다.


이번 여름 미치도록 더웠지만, 어차피 그런 것이니 다 잊고 보내주어야겠다.  


찬 바람이 불면 (by 김지연): 4분 18초

작사/작곡: 김성호

1990년 발매된 김지연의 1집 앨범 수록곡

가수 김지연은 1988년 대학가요제 본선에 참여하고 대전 지역에서 가수로 활동하다 1990년에 데뷔 앨범을 내었다고 한다. 신승훈, 심신과 함께 '대전 3인방'으로 묶여서 소개되었다고 하는데, 1집 '찬 바람이 불면'이후에는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작곡가인 김성호는 싱어송라이터로서 본인의 1집에 수록된 '김성호의 회상'(바람이 몹시 불던 날이었지....로 시작하는, 산울림의 '회상'이란 곡이 있어 구분하기 위해 이렇게 한 듯...)등 좋은 곡을 많이 만들었는데, 멜로디가 완만하게 오르내리는 느낌?을 준다.

내게 이 곡은 대표적인 쇠놰형 노래인데... 군대 시절 전방 근무 시에 가을부터 겨울까지 하룻밤에도 수십 번씩 반복해서 듣던 노래다. 서늘한 비무장지대 산자락에 Lo-fi로 울려 퍼지는 노래는 분위기도 스산했지만, 왜 이 노래가 대북 방송에 메인 곡으로 선정이 된 것인지... 의문을 갖게 했다. 만약 저작권료를 냈다고 하면 꽤 많은 금액이었을 것 같다. 유튜브에 올라 있는 이 노래의 댓글에도 유난히 군대 시절의 추억을 얘기하는 글들이 많은데... 확실히 90년대 초반 전방에서 근무한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잊혀질 수 없는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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