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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루 Jun 27. 2022

추억 보정과 무의식적 불안

Karu's Story #16

환영합니다, Rolling Ress의 카루입니다.


- 그때가 좋았어.
- 작년이 좋았어.
- 옛날이 좋았어.


  어쩌면 이것들이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행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분명 기쁜 일이 있다가도 속상한 일이 있을 겁니다. 거기까지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기쁜 일만 맞이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속상한 일이 있다고 너무 슬퍼할 필요도 없고요.


  현재의 내가 침체기를 맞는다면 과거에 호황기를 누렸던 이전의 내 모습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나를 과거의 나와 비교하기도 하죠. 지금의 나는 더 초라해 보이고, 과거의 나는 실제보다 훨씬 행복해 보입니다.


  항상 그래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다니다 보면 '아, 그래도 초등학교 때가 좋았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고등학교에 들어오면 '중학교 때가 좋았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지금의 저는 '작년이 좋았었어.'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되뇝니다. 만약 제가 이제 고3이 된다면, 아무리 지금 보내는 시간이 힘들지라도 '그래도 고2 때가 좋았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겠죠.


  우리는 항상 구불거리는 길을 걷고 있어요. 지금도 길을 걸으면서 점점 더 심연으로 빠져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청소년기는 이상적 자아와 현실의 자아가 가장 맞지 않는 시기예요. 거기에서 오는 인지부조화가 우리들을 괴롭히죠. 아직 현실을 직시하지 못해서. 내가 누군지 모르니까.


  '이것보다 더 잘할 수 있는데?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 있는데?'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죠. 왜냐? 예전에 그랬던 경험이 있으니까. 그런데 세상은 빠르게 변화합니다. 제가 자주 언급하죠. 레드퀸 가설. 세상은 빠르게 질주하고 있고, 내가 그것보다 더 빠르게 달리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걸. 세상과 같은 속도로 달려서도 안 됩니다.


걱정이 없던 때로,

신경 쓸 것이 없던 때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됐던 때로,

내가 가장 행복했던 때로.


  돌아가고 싶을 겁니다. 유독 그런 시기의 기억은 우리 머릿속에서 이상하리만큼 빛나곤 하죠. 기억은 그대로예요. 그걸 받아들이는 우리 마음이 그만큼 기억들을 더 닦아주고, 더 잘 보이는 곳에 놓고, 더 반짝이게 하니까. 현재의 내가 더 침체될수록, 과거의 나는 더욱 찬란하게 빛납니다. 그걸 바라보는 현재의 나는 점점 더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죠. 자존감이 낮으면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여러분들은 제 실수를 따라 하지 말길. 당신의 인생에서 빛나지 않았던 때는 없으니까.


  비교적인 관점에서 가치 판단은 언제나 상대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져요. 지금 여러분이 무너져 내렸다고 해도, 앞으로 더 힘든 일을 겪다 보면 역시 그때가 좋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겁니다. 그렇다고 당신이 지금 겪는 아픔을 부정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오히려 받아들이는 게 좋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추억 보정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이겁니다.


과거에 매몰되어 현재를 잃어버린 채 방황하지 말자.


  제가 지금 가장 많이 하는 실수. 추억은 추억으로 남아야 아름다운 법이죠. '과거의 난 이랬는데 왜 지금의 난 이게 안 되지?'와 같은 생각을 하다 보면 당신의 인생은 바닥으로 내려 꽂힐 겁니다. 남과 비교하지 말라고 했죠. '남'이라고 부르는 비교 대상은 과거 자신의 모습도 포함합니다. 1학년의 카루는 지금의 저와는 달라요. 다른 시간축에 사는 남입니다. '나도 저런 모습이 있었구나, 저 때 참 멋있었네.' 하고 넘기면 됩니다.


  우리는 미래를 현재로 끌어당겨 소화해야 할 사람. 과거가 우리를 잡고 있다면 미래를 받아들일 공간이 없습니다. 당신이 내신이 좋았다? 수상을 휩쓸고 다녔다? 좋은 학교에 다녔다? 좋은 친구를 가졌'었'다? 이제는 아무런 의미조차 갖지 못합니다. 자신을 망치는 행위입니다. 당신을 괴롭히지 마세요.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폭력을 휘두르지 말란 겁니다.




  개인은 약해요. 저도 약합니다. 카루라는 사람이 강해봤자 얼마나 강할 수 있을지.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게 아니겠습니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친구를 사귈 수도 있고, 연인을 만날 수도 있고, 배우자를 만날 수도 있고, 아니면 새로운 가족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최소한의 공동체를 이루며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제가 아무리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고 해도, 최소한의 공동체에 속해 있길 원해요.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여기까지가 끝이었다면, 이 세상은 정말 살기 좋았을 겁니다.


  그런데, 어디 실상이 그런가요. 우리 사회의 모습은 그야말로 상대평가의 집합체.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됩니다. 제가 항상 말하죠. 밟히기 싫으면 내가 남을 짓밟아야 된다고. 성적표가 나왔어요. 1학년 때 내신과 2학년 때의 내신이 크게 별 다를 게 없습니다. 소폭 오르긴 했어요. 그런데, 1학년 때는 제가 응급실을 가느라 영어가 8등급이 떠버렸죠. 그런데 내신이 별 차이가 없다는 말은, 전체적으로 성적이 하락한 겁니다.


  아직 반등 가능성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NOCHES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비질란테에 목숨 걸고 달려드는 일도 아직 멈추지 않았습니다. 당신들과 함께라면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저에겐 길이 많아요. 언어학과나 ELLT를 들어가서 컴퓨터공학과를 복수 전공할 수도 있고요. 융합적 인재의 발판을 마련했다면, 그만큼 많은 길이 깔려있습니다. 저는 그 길 중에서 제 길을 선택만 하면 됩니다.


  여기까지는 행복 회로. 그런데, 일단 내신이 5점대 밑으로 떨어지는 일이 있어선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제 로드맵이 틀어져버려요. 생각해봅시다. 1등급부터 9등급까지 있죠. 내가 1등급이라면, 누군가는 9등급이 됩니다. 어쩌면 내가 9등급이 될 수도 있습니다. 1등급만큼이나 받기 힘들지만, 9등급도 있긴 있어요. 이 치열한 상대평가의 지옥 속에서, 순위가 엎치락뒤치락하다 보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겁니다. 죽어라 공부해야 하고, 또 죽어라 친구들과 싸워야 합니다. 죽기 살기로. 독기를 품어야 한다는 얘기죠.


  가끔씩은 카르텔을 타파하기 위한 새로운 공동체 내에서 또 다른 카르텔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1등급들을 깨부수자!'라는 포부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었는데, 그 그룹 안에서 나 빼고 다 1등급이라든지. 속상하죠. 그래도 뭘 어쩌겠어요. 우린 그래야 하는 운명인걸.


  저는 운명론적 관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게 편해요. 그래서 항상 말을 할 때도 '될 것 같아'라는 표현을 굉장히 자주 씁니다. 내가 나서서 하면 되는데, 그냥 '-ㄹ 것 같아?'라는 표현을 계속 사용합니다. 이쯤 되니 이게 의식적인 표현인지 무의식적인 표현인지 헷갈릴 지경입니다.


  '상대평가 제도는 내가 타파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죠. 무슨 자신감을 가지고 몽둥이 들고 학교를 부수고 다닙니까. 고양국제고를 파괴한다고 상대평가 제도가 사라지지 않아요. 상대평가 제도와 인식을 없애는 것은 그저 관념적인 행위일 뿐, 물리적으로 구체화되지 않아요. 당연한 건데, 시야가 차단되면 이런 당연한 것도 못 보게 된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양국제고의 비교과 활동을 정말 칭찬해주고 싶어요. 제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곳. 제가 인정받을 수 있는 곳. 모두가 모여 시너지를 일으키는 곳. 진짜 '고양국제고답다'라는 게 이런 느낌이 아닐까요. 치열한 전쟁터 속에서 모두가 피 튀기며 서로를 베어 가고 한 명이라도 더 살해하기 위해 광분한 모습보단 훨씬 인간적이지 않은가요. 표현이 좀 과격하긴 합니다만, 제가 보는 상대평가 제도는 그렇습니다. 누군가는 이 상대평가 덕분에 높이 나는 비행기를 타고 흔들림 없이 하늘을 떠다니고 있겠지요.


  우리 창진프, 셰어텍. 제가 정말 좋아하고 아끼는 단체. 제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공동체는 다 그런 것 같아요. NOCHES라든지, 사진부 FLIP, 그리고 창진프 ShareTech, 새로운 비질란테 등. 외부 압력이 없으면, 우리는 충분히 서로의 장점을 존중하고 인정해줄 수 있습니다. 각자의 능력이 합해져 훨씬 큰 성과를 이루는 것, 시너지가 되죠.


  그런데 스터디그룹은 얘기가 좀 달라요. 한정된 과제, 동일한 목표, 치열한 경쟁. 모두가 차분해 보이지만 속은 굉장히 끓어오르는. 아니면 공허하다고 해야 할까요? 각자 불안한 건 당연히 있겠지요. 불안함조차 죄책감을 가질 수도 있고요. 지금 내 옆에 있는 내 동료가 미래에 나를 밟아버릴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런 생각은 동시에 죄책감을 들게 합니다. '나는 이 정도로 쓰레기였던가?', '친구를 경쟁자로만 보게 되는 건가?' 그런데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죠. 합리적인 추론이잖아요. 잘못이 있다면, 이런 사회에 '던져지게 된 것'.


  '던져지게 된 것'. 또 피동문이네요. 일단 이건 우리가 선택한 길이 아니죠? 적어도 대학을 나와야 사회인으로 인정해주는 우리나라의 그런 분위기가 더욱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게 아닐지. 혹시라도 내가 좋은 대학을 못 간다면,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안도할지, 얼마나 나를 우습게 볼지.


  격려와 위로는 어느샌가 불신과 험담으로 전락해버립니다. 서로를 위해서 만든 공동체가 서로를 피폐하게 만들 뿐이라니. 우리의 선택에 따라 공동체가 변할 수 있습니다. '무의식 속 불안감'은 여기에서 출발하는 게 아닐까요.


- 내가 남을 밟고, 남도 언제든 나를 밟을 수 있다는 불안감.

- 상대가 나보다 아래에 있으면 안도하고, 위에 있으면 찾아오는 정신적 패닉.

- 레드퀸 효과에 따라 그저 도태되기만 하는 나.


  대학 서열화를 절대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A대학부터 F대학까지 있다고 해보죠. A 대학은 가장 인지도가 있는 '명문' 대학이고, F 대학은 별 볼일 없는 대학입니다. 이름조차도 유명하지 않아요. 내 친구가 A 대학을 붙었는데 나는 F 대학밖에 다닐 수 없다면,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들 것 같나요?


  물론, '아, 내가 이렇게 대단한 친구를 두었어! 멋지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도 좋죠. 지리 선생님께서도 항상 이런 말씀을 하세요. 남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자기가 추락하는 건 끝도 없으니까. 반대로 남과 비교해서 얻는 행복도 진짜 행복이 아니라는 거죠. 누구나 다 아는 자명한 사실이잖아요? 그런데 마음은 그걸 따라주지 않습니다.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우리의 이성은 끊어집니다. 진동폭이 여러분의 한계 역치를 넘어선다면, 이성이 감성을 제어하는 게 아니라 감정이 우리 몸을 통제합니다. 이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불안이 우리 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게 아닐까요. 설령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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