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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하얀 꽃으로

소식지 구르다 2025, 하지 편

by 구르다

차와 사람과 이야기 14








초의 의순은 홍현주의 부탁으로 <동다송>을 지어 올렸는데 그 시작이 이러하다.




后皇 嘉樹配橘德 受命不遷生南國

密葉鬪霰貫冬靑 素花濯霜發秋榮


“후황이 아름다운 나무를 귤의 덕과 짝지으시니 받은 명 변치 않아 남녘 땅에 자란다네

촘촘한 잎은 눈 속에서 겨우내 푸르고 하얀 꽃은 서리 맞아 가을에 꽃 피우네.”

<동다송> 1송



여기서 아름다운 나무는 차나무다. 후황(后黃)은 임금과 황제를 뜻하니 곧 땅과 하늘과 땅이다. 차나무와 귤은 하늘이 내린 보물이고, 인간이 이를 본받아 번창케 할 만 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차나무는 그렇다 치고 귤이 지닌 덕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다. 초의는 단순한 불교 수행자라기 보다 교학에 두루 능했던 지식인이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문득 350여 년 전에 문종이 적은 시 한 편이 떠오른다.




檀偏宜鼻

脂膏便宜口

愛最洞庭橘

香鼻又甘口


단향목 향은 코에만 맞고

기름진 음식은 입에만 맞는 법

가장 좋은 것은 동정의 귤

코에도 향긋하고 입에도 달다네

<열성어제>, “귤시”




아버지 세종은 말년에 양화도 희우정에 행차해 여러 날을 묵었다. 효자였던 당시 동궁 신분의 문종은 위의 시를 지어 귤이 가득 담긴 소반 아래에 숨겨 놓고, 그 소반을 내시에게 내어주었다. 당시 탐라의 귤은 귀한 물건이라 모두가 기뻐하며 먹었는데 그 아래 숨어 있던 시를 발견하고는 모두가 이 모임의 깊이와 수준에 탄복하며 뿌듯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수행했던 안평대군은 이 분위기를 놓칠세라 안견에게 그 모임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고*, 신숙주에게 화찬을 쓰게 했다.

*<임강완월도(臨江翫月圖)> 혹은 <희우정야연도(喜雨亭夜宴圖)> 라고도 한다.


단향목은 첫 향이 진하고 달아 사람을 혹하게 하지만 오래 맡고 있으면 머리가 아플 정도로 도드라진 내음 때문에 금세 질리고 만다. 기름진 음식 또한 입을 즐겁게 하지만 먹고 나면 더부룩 한데다 입가심을 부르고 몸에도 좋지 않다. 그에 반해 귤은 좋은 냄새가 나지만 튀지 않고, 맛은 달지만 물리지 않으며, 후에도 몸을 괴롭히지 않으니, 코와 입에 모두 좋다. 이는 곧 훌륭한 정치와 닮았다. 문종은 존경하는 임금이자 아버지의 덕을 귤로 노래했다. 신하들은 그 속내를 알아채고 동궁의 속 깊음을 칭찬하고 훌륭한 덕의 정치를 펼치는 세종을 찬양했다.



차나무는 어떠한가. 뿌리는 깊어서 키만큼 자라는 데 드러나는 몫만큼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소홀하지 않다. 앞과 뒤가 한결같은 사람은 드물다. 잎은 상록수라 겨울이 되어도 푸른데, 꽃은 작은 흰 장미와 같이 고아하면서도 잎 뒤에 살짝 숨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화려한 것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기를 즐겨하는데 차꽃은 겸손해서 뽐내지 않음에도 그 미려함이 숨겨지지 않는다. 열매는 어떨까. 열매라 하면 계절 중 가을을 떠올리곤 하는데 수확의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철이 되면 모두가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데도 차나무는 묵묵히 열매를 맺어 떨어뜨리지 않는다. 한 철 지나 차가운 바람이 깃들어 모두가 때가 아니라 생각할 때 오히려 열매를 땅에 내린다. 무르익고 때가 되었음을 판단하는 것은 오직 솔직한 내 마음의 문제일 뿐 세상과 사람들이 수군대거나 때가 되었다고 종용한다고 해서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점을 빗대어 차나무를 군자와 같다고 말한다.



세상에 이롭지 않은 식물이 어디 있고, 배울 것 없는 생물이 어디 있을까. 유월이 무슨 색깔이냐 묻는다면 나는 흰색이라 하겠다. 우리 아파트 단지는 오래되어 큰 나무와 늙은 나무가 많다. 치자꽃이 피고, 고광나무와 다정큼나무, 남천과 광나무꽃도 하얗게 피었다. 아직도 이름을 찾지 못한 나무도 몇 그루 있는데 반질거리는 것, 오동통하니 폭신한 것, 쪼그마한데 기름기가 적어 파삭거리는 것까지 죄다 하얗다. 저 멀리 산에는 밤나무꽃이 하얗게 흐드러진데 유월은 푸름 사이로 하양이 번지는 수채화 같은 달이다. 일 년 중 두 번 하얗게 뒤덮이는 내 주변의 대지를 바라보며 나는 어떠한 덕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을까. 오늘 우리 딸내미 하원길에 손을 잡고 흰 꽃을 주우며 유월 제주에 필 감귤꽃부터 앞마당 치자나무꽃까지 꽃꽃꽃 꽃노래를 불러야겠다.







2025년 6월 21일,

정 다 인








당신을 보듬다, 소식지 구르다, rollingtea.net








Hishikawa Sori III, Potted adonis with writing implements, 1800

https://www.artic.edu/artworks/81202/potted-adonis-with-writing-imple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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