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 구르다 2025, 처서 편
차와 사람과 이야기 18
사랑하는 프랑스의 작가 구스타브 플로베르는 1849년, 28세 때 막역한 친구 막심 뒤캉과 이집트로 여행하게 되었다. 그들은 9개월 동안 이 아이러니한 세계 -구세계의 중심이며 문화의 성지며 동시에 서양의 젊은 작가에게는 완벽하게 낯설고 새로운 신세계였던 이유로- 에 머물며 작품을 구상했다. 그들은 지방 명사들을 방문하고, 순례자들과 상인들의 캐러밴 대열에 동참하기도 하고, 나일강을 따라 여행하기도 했다. 플로베르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며 이렇게 묘사한다.
“어머니, 바다에서 은이 녹듯, 작렬하는 빛, 바로 그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매일 같은 일상의 반복과 글쓰기의 권태로움을 탈피해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의 세계를 경험했다. 이곳에서 권태와 멜랑콜리, 욕망과 절망이 뒤얽힌 걸작 《마담 보바리》를 구상했다. 나일강이 내려다보이는 어느 메마른 언덕 위에서 “됐다! 주인공의 이름은 엠마 보바리로 해야지!”라며 뜬금없이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무엇이 그의 감각을 일깨웠던 걸까. 낯선 곳은, 새로운 세계는 우리에게 무엇을 느끼게 할까. 그 답은 가보지 않고서는 알기 어려운 법이다.
어릴 적 고고학을 전공하고 싶었던 내가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 나일강을 따라 남쪽으로 탐험하는 뱃길의 끄트머리에 있는 아스완(Aswan)의 풍경을 눈에 담아보고 싶다. 사막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야자나무와 코끼리 떼, 그리고 거대한 화강암 옥석들 사이에서 오래전 이집트 왕국, 그리고 그 이후의 로마제국이었던 이곳의 영화를 고스란히 찾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실 이 도시는 서양의 부호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유명했던 휴양지이기도 했다. 늦은 오후면 출발하는 삼각돛을 단 소형선박 펠러커를 타고 룩소르를 향해 나아가는 여행을 떠나고는 하던 이곳에는 ‘올드캐터랙트호텔’이 있다. 작가 애거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는 이곳을 무대로 삼아 《나일강 살인사건》이란 소설을 집필했다. 에드워드 시대의 영국풍과 오리엔트의 우아함이 절묘하게 섞여 있는 마술 같은 분위기의 이 장소는 예술가들에게 무한한 영감의 성소가 되기도 했다.
이제는 찾아보기 어려운 풍경들 가령 무명으로 짠 갈라비야스 두건과 쉬하스라는 담뱃대를 직접 만들어 팔고 있는 모습도 아스완에서는 쉽사리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알라딘이나 천일야화를 떠올리며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구할 수 있다. 양탄자, 금덩어리, 희귀한 보석 장식품,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는 꽃병과 접시들, 괴상한 옷감과 특이한 향수, 그리고 이집트 사람들이 3천 년 전에 만들어 썼던 화장품까지. 로렌스 더럴(Lawrence Durrell)이 쓴 《The Alexandria Quartet》 4부작 중 마지막 권에서 아스완이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그 안에 아스완 최고의 찻집으로 엘피샤이(El-Fishawi)가 등장한다.
“나는 엘피샤이(El-Fishawi)의 어둑한 내부에 앉아, 카이로에서 온 친구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찻잔 위로 떠 오르는 민트 향기와, 창밖으로 들어오는 먼지 흙탕물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클레아(Clea)를 처음 마주쳤다.”
차 한 모금 속에서 사랑과 미스터리가 솟아난다.
“엘피샤이의 테이블 위에 놓인 일곱 개의 작은 주전자. 그 위에 새겨진 문양이 암호였다. 나는 차를 따르며, 그 암호를 풀어가고 있었다.”
작은 나무문에 새겨진 아랍어 서예 현판, 그 아래로 온갖 잡상인들과 부호들, 자유로운 영혼들과 걸인들이 뒤섞인 아수라 한복판에서 민트잎을 넣은 진하고 달콤한 차 향기가 먼지 냄새와 맞부딪히며 소용돌이를 만들어 낸다. 소란과 침묵 사이를 헤매는 주인공은 고개를 숙이고 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먼지 입자를 튕겨내며 반짝거린다. 아, 사랑스러운 순간이다.
물론 이곳은 실제로는 아스완에 있는 것은 아니고 수도 카이로 칼릴리 시장 안에 있는 유서 깊은 찻집이다. 1797년 이래로 수 세대를 거쳐 가족들이 운영하고 있는 곳으로 문인들과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아온 곳이다. 로렌스 더럴의 소설에 등장하며 불후의 명성을 얻게 된 곳, 금박을 입힌 거울과 세공 망치로 세심하게 두드려 만든 놋쇠 그릇, 이리저리 금이 간 세월의 흔적을 짊어진 대리석 테이블의 이 찻집은 19세기 영국과 프랑스 독일의 혼합된 분위기에 이집트의 오랜 정서, 그리고 이슬람의 색깔이 묘하게 수 놓인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에서는 수연통으로 물담배 한 모금 빨아들이고, 운수를 점치고, 사람들을 구경하고, 온갖 잡상들이 드나드는 꼴을 감상하고, 차뿐만 아니라 이 도시 최고의 커피를 주문할 수도 있다.
그 옆에 있는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도 알 길 없는 작은 향수 가게에 들어서면 코를 찌르는 복잡한 향들의 어지러움 사이로 익숙하고 농후한 차 향기가 정신을 깨운다. 자리에 앉으라며 주인이 권하는 홍차 샤이(shai) 한 잔은 투명한 유리잔에 가득 담긴 빨간 마음 같아 보인다. 샤이는 가게를 가든, 친구 집으로 놀러 가든, 이집트의 그 어디를 가든 곁을 빠지지 않는다. 사막으로 둘러싸인 건조하고 더운 이 땅에서 설탕을 듬뿍 넣은 홍차, 샤이는 필수품 같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현기증으로 바뀌고, 다리는 쉽게 풀어지니까. 마치 흡연자가 아침에 일어나 담배 한 개비로 하루를 열 듯, 이곳의 사람들은 아침 샤이를 즐긴다. 공부하다가도 한 잔, 일하다가도 한 잔, 수업과 수업 사이에도 한 잔.
손님 대접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슬람 문화의 영향으로 샤이는 그 우호감과 친밀함, 예의의 자락에 존재한다. 반대로 손님은 거부할 권리가 없다. 그건 실례니까. 그러고 보면 역사가 아주 오래된 나라에는 손님을 맞이하는 법, 그리고 손님으로서 주인을 대하는 법에 관한 나름의 규범과 규칙이 돈독하게 존재한다. 비록 표면적인 행위일 따름에도 오랜 세월 사회를 유지하고 문화를 지켜나가는 데 있어 타인에 대한 배려가 근간이 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게 한다.
더운 나라에서 콜라나 사이다 같은 청량음료를 마시지 않고 웬 홍차냐 하겠지만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고 치부할 일은 아니다. 차 안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하지만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왜일까. 차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니까. 콜라 하나를 주어도 냉장고에서 꺼내 그냥 주는 것보다는 잔에 담아내는 것을 우리는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주전자를 꺼내고 물을 부어 불 위에 올리고, 끓을 때까지 기다리고, 차통을 열어 찻잎을 덜고, 이걸 붓고 기다려서 우려내고, 걸러서 잔에 담고, 설탕을 넣어 주는 일. 더운 나라에서 이만하면 충분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할 수 있는 대단히 아름다운 행위 아닐까. 물론 이걸 마셨을 때 늘어졌던 몸을 힘차게 움직이게 하는 효능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두고서라도 말이다.
날이 덥다. 더우면 행동이 굼떠진다. 만사가 귀찮다. 그러니까 이럴 때일수록 주변을 챙기지 않으면 안 된다. 다정하게 웃으시고, 인사 건네시고, 차 한잔 같이하며 여름을 이겨내자.
2025년 8월 23일,
정 다 인
당신을 보듬다, 소식지 구르다, rollingtea.net
위 그림
Max Slevogt, The Nile near Aswan, 1914
https://artsandculture.google.com/asset/the-nile-near-aswan/sQEmq2TNYuJOsA?hl=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