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 구르다 2025, 백로 편
차와 사람과 이야기 19
조선 말엽 선승이자 차인이였던 초의 의순은 이런 말을 했다.
“알가의 참된 본체로 오묘한 근원을 찾으면
閼伽眞體窮妙源
오묘한 근원이란 집착 없는 바라밀이어라.”
妙源無着波羅蜜
불교의 법과 관련한 경전 용어 중에는 산스크리트어를 소리 나는 대로 한자로 음역한 것이 아주 많다. 재미있는 점은 번역에 있어 한자의 고유한 뜻과 원어의 의미가 맞닿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 이 두 문장 안에도 그런 용어가 둘 있으니, 하나는 ‘알가’고 나머지 하나는 ‘바라밀’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알가(argha)는 부처님께 올리는 깨끗한 물, 즉 공양수다. 초기 인도 불교에는 중국 중심의 대승 불교가 내세우는 여섯 가지 종류의 공양인 육법공양의 초기 형태가 있었다. 학자들은 이를 편의상 육종공양이라고 부른다. 육법공양이 등-향-차-꽃-쌀-과일이라면 육종공양은 도향-소향-화만-반식-알가-등명으로 번역한다. 여기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를 이해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공양물에서 두 지역의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동아시아의 육법공양물들은 대부분 쉽게 구하기 어려운 것에서 비교적 편한 것의 순서로 나열되어 있다. 중국이 불교, 그중에서도 선종 불교를 본격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 석가모니의 죽음 이후 천 년도 훨씬 뒤의 일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초기 불교의 모습이 물질과 정신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시대의 요구와 맞물려 상당히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두드러지는 부분이 향이다. 고대 중국에서 향은 구하기 매우 번거롭거나 어려운 고급 공양물이었다. 월남에서 수입해 오는 침향은 말할 것도 없었는데,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한 량의 향을 구하기 위해 쌀 수십 석이 필요했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공양 한 번 제대로 올리고 싶어 했다가는 일가족의 한 해 살림살이를 거덜 낸다 해도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초기 불교에는 도향(塗香)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말 그대로 향을 몸에 바르는 것이었다. 물론 부자는 향유를 바르기도 했겠지만, 평등의 가치를 우선시했던 만큼 민중의 지지가 강한 것이 불교였고 대부분은 비싼 향유를 쓰기는 어려웠다. 도향은 몸을 정갈하게 한다는 의미가 강하고, 신 앞에 나서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으로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물론 정갈함이란 악취를 가린다는 의미도 있으니 실제로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향기 나는 꽃이나 식물 등으로 몸을 치장하는 것도 유의미한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공양이란 신에게 대가성으로 무언가를 바친다는 의미보다 자기 준비에 조금 더 가까운 의미였을 것이고, 그것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나 격을 놓고 보았을 때 보다 자연스럽다. 아무리 생각해도 석가모니가 비싼 공양을 받았다고 성불을 시켜주었으리라고 보기는 자연스럽지 않으니까.
또 다른 하나는 이와 맞물려 있는데, 육종공양은 마음만 굳게 먹고 노력하면 할 수 있는 것 위주로 짜여 있고, 육법공양은 이에 비해 보다 물질의 가치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향뿐만 아니라 알가다. 한자로 알가는 ‘가로막다’는 뜻의 閼과 ‘절’을 의미하는 伽의 합이다. 알가는 부처님께 올리는 깨끗한 물을 뜻하는데 ‘절을 가로막다’ 혹은 ‘가로막고 있는 절’ 따위의 해석을 내놓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앞서 말한 대로 산스크리트어의 음역일 뿐이니 알가의 한자어 해석에 괜히 힘을 쓸 필요가 없다. 이 알가는 중국불교에 들어와서 차를 의미하는 법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대일경>에서는 “행자는 머리 숙여 절하며 알가수를 봉공한다. 그 후 알가기에 담아 진언을 외우고 공양한다.” 라는 표현이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알가수를 차로 해석하여 차를 올리기도 하지만 본래 알가란 그냥 깨끗한 물이다. 하지만 그 의미를 생각해 보면 만만치는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인도에서 깨끗한 물이 우리처럼 발에 챌 정도로 흔한 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실제로 석가모니의 생전 에피소드 중에는 이런 일이 있다. 어느 날 석가모니가 제자를 시켜 목이 마르니 물을 떠 오게 부탁했는데 제자가 스승이 말씀하신 곳에 가 보았더니 흙탕물과 오물로 물이 몹시 더러웠다. 제자는 잠시 고민을 했는데 스승의 말씀은 곧 법이라 지켜야 한다는 약속과 이 물은 오염되어 있으니 차마 가져다드릴 수 없다는 마음의 소리가 서로 부딪혔다. 제자는 결심하고 물을 떠 가지 않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석가모니는 이에 몹시 흡족해하시며 다시 그곳으로 가서 물을 떠 오라고 재차 부탁하셨다. 제자는 의구심이 일었지만, 말씀대로 그곳으로 향했고 거기에는 깨끗한 물이 찰랑찰랑 넘쳐 흐르고 있었다.
2025년 9월 7일,
정 다 인
당신을 보듬다, 소식지 구르다, rollingtea.net
위 그림
Yves Klein, IKB 79, 1959
https://www.tate.org.uk/art/artworks/klein-ikb-79-t01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