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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눈물’

소식지 구르다 2025, 한로 편

by 구르다

차와 사람과 이야기 21










지금으로부터 1,800여 년 전 중국 한나라 시대에 한 나무가 페르시아에서 건너왔다. 2백여 년 뒤부터는 이 나무에서 난 꽃잎으로 사람들이 차를 만들어 마시기 시작했다. 그 양이 매우 적어 크게 유행하기 어려웠는데 본격적으로 상품으로 만들어진 것은 청나라에 들어오고부터였다. 대다수는 서양으로 팔려나가는 효자상품이 되었다. 이 꽃의 이름은 재스민, 여린 찻잎에 재스민을 조금 섞어 둥글게 말아 냈다. 재스민 나무를 중국에서 말리茉莉라고 부르니 이 차는 말리화차, 서양에서는 그 생김새가 진주를 닮았다 하여 재스민 펄Jasmine-pearl 혹은 재스민 드래건 피닉스 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혹자는 ‘부처의 눈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째서 부처의 눈물이라 이름 붙였는지 말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문학적 상상력을 조금 발휘해 보자면 아마도 이 동그랗게 말린 찻잎과 재스민 꽃잎 덩어리의 은은한 빛깔과 향이 슬픔에 젖어 있는 당신을 도우리라는 일종의 구원에 관한 기대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니 보다 분명하게 말하면 이 차는 부처의 눈물이 아니라, 부처의 은혜로 내가 흘리는 눈물이라고 불러야 맞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왜 자꾸 눈물이라는 단어가 나오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아함경』은 지난 세월 중국에 전래한 것을 한글로 풀이해 소개한 종류에 그쳤다. 쉽게 말해 의역한 것이다. 의역은 태생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지닌다. 오역이 줄을 잇고, 곡해가 뒤를 따르기도 한다. 문장의 표면 그대로를 전달하는 류가 아닌 경전이나 철학, 문학 작품 등은 의역해선 안 될 종류의 책으로 꼽히는 이유가 그것이다. 글자의 표면 아래 숨은 의미가 많기 때문이다. 한 번의 번역을 거칠 때마다 매달려 있던 수많은 의미가 나뭇잎처럼 우수수 떨어진다. 그래서 몇 해 전 출간된 완역본 『아함경』은 의미가 깊다.


『아함경』은 붓다와 제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초기 경전이다. 혹자는 이를 불교 경전의 시작이고, 참뜻을 모은 글이라고도 한다. 이 책의 첫 번째 권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의 육신이 더없이 지쳐있었다. 단식을 통해 얻은 맑고 깨끗한 기운 덕분에 숨은 붙어 있었으나 말할 수도, 걷거나 설 수도, 손가락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듯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제자들은 붓다가 성취한 경지를 바로 곁에서 보거나 들은 까닭으로,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눈물 흘리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때 동네에서 염소를 기르던 가난한 시골집 소녀가 붓다를 보았다.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소리 한가운데에 앉은 남자를 보았을 뿐이다. 그녀는 살아 있으되 살아있지 않은 것 같은 남자의 눈을 보았다. 더없이 맑은 눈에 빠져 한참을 쳐다보던 소녀는 문득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집으로 돌아가 염소의 젖을 짜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소녀는 주변의 웅성거림에 아랑곳하지 않고 따듯한 염소젖을 붓다에게 먹였다. 맹물을 먹어서도 안 되고, 딱딱한 곡류나 기름기 많은 고기도, 결이 거친 채소를 먹을 수도 없던 몸에 염소의 젖은 최고의 음식이었다. 하지만, 이 사태에 붓다를 따르고 존경하던 다섯 큰 제자가 그의 곁을 떠났다.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붓다는 아무 말 없이 몇 일간 소녀의 보살핌을 받아 마침내 일어나 걷게 되었다. 소녀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녀는 끝까지 자신이 살린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다. 아니, 별 관심이 없었다. 붓다는 소녀에게 감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을 떠나버린 제자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밤낮을 쉼 없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걷었다. 오랜 시간이 걸려 그들이 모여 있던 여관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들은 붓다를 발견하고 모여들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쉼 없이 아주 오랫동안 신랄하고 악독한 말들을 퍼부었다. 그들은 한 말을 스스럼없이 어길 수도 있다는 것을 붓다 스스로 보여주었으니 그 좋은 말들이 참이라 해도 당신은 이를 담을 그릇은 못 된다며 그를 표독스레 쏘아붙였다. 붓다는 그 모든 비난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들의 비난은 곧이어 책망이 되고, 원망이 되고, 나중에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제자들이 모두 기진맥진 지쳐버리고 한 마디도 더 보탤 것이 남아있지 않았을 때 붓다가 말한다. “이제 모든 말을 다 뱉어내었느냐. 그러면 된 것이다.” 현명한 제자 한 명이 일어나 공손하게 절을 올린다. 그리고 연이어 다른 제자들이 차례차례 공손히 절하고 그의 품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붓다에 관한 이 기록은 바로 보시布施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보시란 자비로운 마음으로 조건 없이 베푸는 것을 뜻한다. 대부분 보시는 물질적인 것, 즉 재물을 베푸는 일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여기에 표면적인 나눔 그 이상의 것이 있음을 이야기가 보여준다. 배고픈 이들과 먹을 것을 나누고, 희망 없는 이들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며 그들이 스스로 희망을 떠올리게 하는 것도 보시다. 최고의 보시는 마음에 남아 있는 나쁜 찌꺼기들을 남김없이 털어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상상해 보면 얼마나 낭만적인가. 그리고 얼마나 쉽고 간단한 일인가. 나의 잠자코 있음이 너의 마음속 슬픔과 원망과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니 말이다. 모든 불행이 말에서 시작된다면 그 불행의 찌꺼기를 덜어내는 일도 말에서 비롯하는 것이겠지. 처절하게 부르짖고, 소리 내어 외치고, 은밀함을 꺼내놓고 나면 왠지 속이 후련해지고 마음이 가벼워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눈물을 닦아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걸 잠자코 들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석가모니가 자신을 등 돌리고 떠났던 제자들을 다시 찾아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논쟁을 벌였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아니면 떠나버린 이들은 그저 남이거니 모른 척 세상을 유람했더라면 또 어찌 되었을까. 석가모니가 했던 것처럼 모든 울분과 원망을 묵묵히 들어주는 일 외에 더 나은 방법이 있을까.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좋은 사람인가. 당신 곁의 소중한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평생 남고 싶은가. 그 어떤 재물과 정성으로도 베풀 수 없는 가장 속 깊은 보시가, 은혜가, 사랑이 여기에 있다. 가만히 들어주시라. 날이 새도록 밤이 깊도록 그와 이야기하고, 그녀에게 귀 기울여 주면 좋겠다. 눈물로 모두 젖은 밤이 지나고 나면 해가 뜨고 모든 걸 말려 줄 테니까.








2025년 10월 8일,


정 다 인








당신을 보듬다, 소식지 구르다, rollingtea.net






위 그림

Max Ernst, Naissance d'une galaxie, 1969

https://www.fondationbeyeler.ch/en/beyeler-collection/work?tx_wmdbbasefbey_pi5%5Bartwork%5D=33&cHash=3e94d835f5fc0e7ff1213bc6cefca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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