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찻자리의 주인

소식지 구르다, 입동 편

by 구르다

차와 사람과 이야기 22










센노 리큐는 <리큐백수(利休百首)>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稽古とは一より習ひ十を知り十よりかへるもとのその一


茶の湯をば心に染めて眼にかけず耳を潜めてきく事もなし



茶はさびて心はあつくもてなせよ道具はいつも有合にせよ


釜一つあれば茶の湯はなるものを数の道具を持つは愚な


数多くある道具を押しかくし無きがまねする人も愚な



茶の湯とは只湯をわかし茶をたてゝ飲むばかりなる事と知るべし




연습이란 하나부터 배우는 것이 열 개를 알고 열 개를 얻는 근원이 된다.


다도를 닦으면 마음을 기울이므로 눈에 띄지 않고 귀를 기울여 듣는 일도 없다.



차는 사비(さび)답게 마음은 넉넉하게 대접하라. 도구는 언제나 갖추어라.


솥 하나 있으면 차는 되는 것인데 그 많은 도구를 가진다니 어리석은 일이다.


수많은 도구를 들이밀거나, 아무것도 없는 척 흉내 내는 사람도 어리석다.



다도란 차를 끓여 마시는 것에 불과함을 알아야 한다.





리큐가 제자들을 위해 남긴 가르침 중에서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다. 리큐가 세우고자 했던 차는 단호함이라는 기암절벽 위에 매달려 결코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는 나무 한 그루와 같다. 그의 차가 아름다운 것은 시각적인 풍성함이나 화려함으로 장식하는 기술적인 부분 때문이 아니다. 찻자리를 구성하는 모든 유무형의 요소들이 완벽함에 가깝게 일관성을 띤다는 점인데, 단순히 도구의 배치나 점·선·면의 통일감 정도가 아니라 이것이 여기에 위치해야 하는 이유와 저것이 이것 옆에 있어야 하는 이유에 관한 명확한 지침과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차실은 단순히 네 개의 기둥과 바닥, 지붕으로 구성된 독립적인 공간에 그치지 않고 들어오기 위한 공간과 거쳐서 나가는 공간, 즉 차실에서 이어지는 정원까지를 차실의 일부로 본다. 따라서 리큐가 의도하는 차실의 목적성에 걸맞지 않은 정원의 생김새는 불편하고 아름답지 않은 것으로 본다. 리큐는 제자들에게 차실이란 불 세계를 지상에 구현한 공간이라 가르쳤으므로 그의 차실 정원은 단연코 상록수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사계절 푸르러 시간의 개념을 잊고, 차실에 들어선 모두에게 스스로가 영원불멸의 세계 속 그저 평범한 구성원일 뿐임을 자각하도록 의도했다. 같은 결로 차 한잔을 마시기 위해 모인 오전의 차회에서 1부로 구성한 식사 시간(가이세키료리)에 채식으로만 구성한 지극히 검소하고 단순한 도시락을 내놓는다는 식이다. 센리큐에게 차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혼돈의 인생에서 참된 길(道)을 찾는 수행이었다. 따라서 차에 일관성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찻자리에 필요한 도구에 관해서도 같은 생각이었다. 당시 교토의 차회는 군웅할거의 시대였다. 수많은 스타일과 유행이 등장하고 섞이고 사라지는 시대였고, 유행의 최첨단을 이끄는 사람들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도구를 중심으로 찻자리가 이루어지고, 값비싼 물건과 화려한 장식적 행위가 성공 여부를 좌우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인물이 센리큐였다. 그가 말하는 탕솥은 일본어로 가마라 부르는데 요리로 치자면 냄비에 해당한다. 여기에 물을 넣고 불을 지펴 끓인 후에 솥 안에 직접 갈아 둔 찻잎을 넣어 끓여 국자로 떠서 그릇에 담아 마시거나, 찻잎은 따로 완이라는 그릇에 가루 상태로 넣고 솥에서는 깨끗한 물만 끓여 따로 덜어 담아 섞어 마시거나 했다. 그러니 진정 차를 마시기 위한 일로만 친다면 솥 하나면 못 마실 일도 없다. 차는 찻잎과 끓인 물, 그리고 담을 그릇만 있으면 못 할 일이 없다. 나머지는 그저 기술적인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기술의 영역을 넘어서면 감각의 영역으로 나아가니 여기서부터는 지극히 주관의 세계다. 차를 단순한 음료와 기술적 취미의 세계로 정의한다면 여기서 더 나아갈 일이 없다. 반대로 센리큐에게 차는 음료도 기술적 취미의 영역에 그치지 않고 다도라 부르는 구도의 방편이니 기물이라는 도구가 차의 위치에 대신해서 서 있는 꼴이 영 불편했을 것이다. 기물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일 뿐 그 자체가 목적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의 세태는 기물을 갖고, 늘어놓고, 자랑하고, 칭찬하고, 이를 통해 즐거움을 누리는 데에 멈춰 있으니 일종의 본말전도 혹은 어불성설이라 말해도 좋지 않을까.



도구는 그저 도구일 뿐이다. 찻그릇과 기물은 나의 찻자리를 구성하고 다채롭게 만드는 좋은 러닝메이트다. 다만 그들과 함께 건강한 달리기를 하고, 차 생활이 보다 튼튼해지고, 내 삶이 조금 더 다채로워지기 위해서는 도구 따위에 찻자리의 주인으로서 내 역할을 빼앗겨서는 안 될 것이다. 도구에 집어삼켜져 주인은 보이지 않고 찻그릇 얘기, 접시 얘기, 하다못해 깔아 놓은 보자기나 다식 얘기 따위로 공간과 시간이 기억되는 일은 얼마나 서글프고 안타까운 일인가. 요즘은 차회가 죄다 그런 일투성이 아닐는지. 주인이 오롯이 기억에 남는 찻자리가 얼마나 오래전 기억일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2025년 10월 8일,


정 다 인








당신을 보듬다, 소식지 구르다, rollingtea.net








Josef Albers(1888-1976), Homage to the Square: Soft Spoken, 1969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481031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작은 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