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스패로>를 감상하고
도미니카(제니퍼 로렌스)는 촉망받는 발레리나다. 후보 발레리나의 질투심에 다리가 부러진 도미니카는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게 된다. 러시아 정보국 고위직인 그녀의 삼촌은 사람 심리를 잘 꿰뚫는 도미니카를 눈여겨보고 그녀에게 ‘스패로’, 즉 스파이가 될 것을 권유한다. 혹독한 훈련을 거친 끝에 도미니카는 최고의 ‘스패로’로 거듭난다. 러시아에 CIA가 심은 첩자를 알아내는 임무에 도미니카가 투입된다. 아픈 어머니를 미끼로 끊임없이 그녀를 옥죄는 러시아 정보국과 삼촌에게서 벗어나고자 도미니카는 CIA에 이중 스파이를 자처한다.
얼마 전 미국 법무부는 러시아 출신 유학생이 보수 정치인과 총기 협회를 이용해 자국 정책에 개입하려 한 스파이라고 발표했다. 언론은 ‘미녀’, ‘섹스’, ‘유혹’ 이 세 단어로 지면을 가득 채웠다. <레드 스패로>와 비슷하다. 이처럼 <레드 스패로>의 소재는 얼핏 낡은 듯 보이나 현재진행형이다. 십수 년이 지나도 미인계는 유효할 거다. 하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별반 새롭지는 않을 것이다. 마타 하리 관뚜껑이 닫힌 지도 벌써 100년이 넘은 오늘날, 비슷한 얘기를 질리도록 접했기 때문이다. 이젠 별 감흥도 없다.
감흥 없는 설정에 기반한 첩보물은 더욱 기본에 충실해야만 한다. 첩보물은 예측 불가능해야 한다. 주인공의 모든 행동이 의심되는 순간, 관객들의 심장 박동 수는 높아지고 손바닥엔 땀이 맺힌다. 초조한 나머지 상영 시간은 게눈 감추듯 지나간다. 과연 도미니카의 본심은 뭔지, 정말 CIA에 포섭된 건지, CIA 요원 네이트를 향한 마음은 진심인지 등 관객이 의심하게 만들어야 한다. 미덕이 넘치는 첩보물에 에로틱한 자극까지 추가된다면 죽었던 감흥은 금세 되돌아올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레드 스패로>는 안타깝게도 구시대의 유물을 그대로 답습한다. 주인공은 소위 ‘미녀 스파이’의 전형인 러시아 출신이고 유혹해야 하는 상대도 자칭 ‘영원한 라이벌’, 미국이다. 청진기 대보기도 전에 혈색만 봐도 답이 나온다. 우려대로 긴장되는 장면이 거의 없다. 디스크 빼돌리는 장면 하나 정도다. 스크린에 관객을 빨아들이는 힘이 너무 약하다 보니 주인공이 무슨 결정을 내려도 관객은 심드렁할 뿐이다.
불필요한 노출도 영화의 질을 떨어뜨린다. 극 초반 도미니카의 노출 장면은 함부로 몸을 내어주지 않겠다는 도미니카의 굳센 자아와 상대의 심리를 농락하는 그녀의 성격을 드러내 유효했다. 그녀가 영화에서 유일하게(그것도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섹스를 한 상대가 네이트란 점도 노출 장면과 맞물려 그가 그녀에게 어떤 존재인지 암시한다. 그러나 헐벗은 상태로 물고문당하는 장면은 불필요했다. 도미니카를 추궁하고 싶으면 애초에 그녀 어머니를 데려와 고문하면 된다. 굳이 도미니카를 고문할 필요 없다. 도미니카의 모든 동기는 ‘어머니’ 그 자체 아닌가.
장점이 없진 않다. 제니퍼 로렌스, 조엘 에저튼, 제레미 아이언스 등 명배우들의 냉철한 스파이 연기는 확실히 보는 맛이 있다. 특히 제니퍼 로렌스의 연기가 일품이다. 영화 내내 큰 표정 변화 없이 작고 낮게 읊조리는 대사는 도미니카의 속마음을 궁금하게 만든다. 러시아의 추위를 그대로 전하는 카메라는 인물 간 심리를 간접적으로 보여줘 화면을 곱씹는 재미가 있다. 잘 짜인 액션 장면과 무미건조한 애정전선은 MSG가 약간 섞였어도 현실감 높게 다가온다.
여담이지만 가끔씩 ‘이 배우가 이 작품에 대체 왜 출연하기로 마음먹었을까’라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상속자들>의 이민호가 대표적이다. <꽃보다 남자>로 대중에 이름을 알렸지만 ‘구준표’는 한동안 이민호에게 족쇄로 작용했다. 귀공자 이미지가 강렬해 차기작에서 맡은 캐릭터에 대한 몰입도를 저해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상속자들>을 택했다. 고등학생, 부잣집 아들, 캔디 여주인공 등 김탄과 구준표나 다를 게 없다. <꽃보다 남자> 시즌 2로 착각할 만큼 유사한 설정과 전개로 김은숙 작가에게 실망한 건 덤이다. 대본만 봐도 감이 올 텐데 왜 이민호가 출연을 결심했는지 의아했다. ‘시청률의 제왕’인 김은숙 작가의 작품을 거절하기 힘들 수 있다. 다만 향후 커리어를 생각했을 땐 귀공자 이미지만 고착화시키는 악수였다.
<레드 스패로>의 제니퍼 로렌스를 보며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이 뻔한 작품을 왜 택했을까. 수려한 외모와 황홀한 몸매, 이 모든 걸 뛰어넘는 연기력 등을 선보인 영화는 그전에도 많았는데.
★: 2.5
18.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