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 한국 흥행 실패에 대한 어쭙잖은 고찰
“인터넷에 '미미'를 검색하면 인형이 먼저 나왔어요. (...) 이젠 제 이름이 조금 더 위에 있어요!"
<라디오스타>에 출연한 그룹 오마이걸 멤버 미미가 “<뿅뿅 지구오락실> 인기를 실감하느냐”라는 진행자의 질문에 내놓은 답이다. 전 세계 트렌드의 중심인 K-pop 시장에서 음악방송 1위를 수차례 거머쥔 아이돌 멤버가 1982년생 미미 인형의 그늘을 벗어나기까지 2015년 데뷔 이래 7년 넘는 세월이 걸렸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미미’는 곧 장난감 인형으로 통용됐다. 굳건한 인기는 제조사 이름마저 ‘미미월드’로 바꾸게 만들었고, 지금까지 국내 완구 업체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다.
바비 인형을 모티브로 한 영화 <바비>는 1조 5천억 원이 넘는 막대한 흥행 수입을 거뒀다.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 2부>를 제치고 영화 제작사인 워너 브라더스 최고 흥행작으로 등극한 건 덤이다. 한편 한국 흥행 성적은 이와 매우 대조적이다. 현재까지 누적 관객수 약 58만 명으로 흥행 실패 판정을 받았다. 이를 두고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서는 ‘페미니스트 낙인 공포는 실재한다: <바비> 한국 흥행 실패('The fear of being labelled feminist is real: Barbie movie flops in South Korea)란 제목의 기사를 통해 한국 내 안티 페미니즘 정서 때문에 <바비>가 흥행에 실패한 것이라 분석했다.
해당 기사는 ‘안티 페미니즘만이 <바비> 흥행 실패 원인으로 규정하긴 어렵다. 여성 중심 한국 영화인 <밀수>의 흥행 성공이 그 예다’란 전문가의 분석을 기사 말미에 첨부했다. 기사 내내 ‘한국 내 여성 인권 실태’ 등을 거론하며 ‘<바비> 흥행 실패 이유’를 운운하다 ‘한국 영화 시장의 특수성’을 살짝 언급하며 기사를 끝맺는다. 단순하고 편협하며 자기중심적인 분석이다. 나아가 페미니즘 뒤에 숨어 조회 수 장사만 벌이려는 저열한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북미 대륙과 유럽 대륙에서 거둔 대대적 흥행 성공과는 달리 <바비>는 일본, 중국, 대만 등 아시아 대륙 전역에서 흥행에 고배를 마셨다. 다른 나라의 문화적 현상을 분석하려면 그 나라의 특수성부터 알아봐야 한다. 같은 대륙이라고 같은 문화를 향유하지 않는다. 나라별로 접근해야 한다. 그렇게 분석한 한국 극장 문화의 특수성이 안티 페미니즘으로 귀결되어도 의문 부호가 달릴 판에 기자는 도리어 편견으로 분석의 포문을 연다. ‘<바비>가 한국에서 망했다고? 영국에선 대박 났는데? 아~ 얘네 페미니즘 싫어하지?’
한국 극장가에 안티 페미니즘 정서가 사실이든 아니든, <바비>의 흥행 실패를 두고 페미니즘부터 파고드는 것은 오히려 기자 본인이 취재를 대충 했다는 증거다. 아시아 전역의 소식을 다루는 기자라면 취재의 한계 등 나름의 고충(?)을 헤아려 줄 수 있다. 그런데 이 기자는 가디언지에 지난 몇 년간 한국 소식만 기재했다. 사무실에 앉아 보도자료를 토대로 전문가에게 전화 몇 통 돌린 뒤에 기사 써내는 기자는 한국에만 있는 줄 알았다.
<바비>는 원작 인형을 기반으로 제작된 영화다. 원작 기반 영화가 제작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원작의 작품성이 매우 뛰어난 경우다.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마틴 스코세이지의 <아이리시맨> 등이 대표적이다. 둘째, 어마 무시한 흥행 성공을 거뒀을 경우다. 웹툰 원작 한국 영화들, <해리 포터> 시리즈, <헝거 게임> 시리즈,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시리즈 등이 그렇다.
<바비> 제작 사유는 두 번째에 해당한다. <바비>의 원작인 바비 인형은 그 자체로 문화 아이콘이 됐다. 그만큼 원작 팬이 두텁다. 자체 세계관도 존재하며 관련 애니메이션도 여러 편 제작됐다. 워너 브라더스가 바비 인형 제조사 마텔과 손을 잡고 영화화에 나선 이유다. ‘원작 팬들만 극장에 와도 제작비는 건질 수 있겠다’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 <바비>는 다행히(?) 원작 팬들의 즐길 거리로 가득하다. 다양한 바비와 온갖 켄이 등장한다. ‘바비랜드’는 형형색색의 장난감 세상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바비 인형을 둘러싼 세간의 비판과 제조사 마텔의 흑역사마저 거론하며 다채로운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바비 문화’를 향유하고 있는 바비 인형 소비자에게 이만한 재미도 없다.
다만 한국엔 바비의 대항마 미미가 있다. 아직 여유롭지 못한 1980년대 한국 소비자를 두고 비슷한 외형을 가진 국내 장난감과 외국 장난감이 경쟁을 벌인다? 어느 한쪽의 완승을 점치긴 힘들어도 호각지세 정도는 예상 가능하다. 심지어 바비 인형의 국내 정식 발매 시기는 미미 인형 출시 4년 뒤인 1986년이다. 2003년 동아일보 기사 ‘[이승재기자의 현장칼럼] 국내 첫 패션인형 미미’에 따르면, 미미 인형은 국내 패션인형 시장의 40~60 %를 차지하며 지난 21년 간 약 2,000만 개가 팔린 것으로 제작사는 추산한다. 그렇기에 어린 시절 바비 인형을 갖고 놀다 어느덧 일에 치이고 사춘기 딸에 치이는 <바비> 속 글로리아처럼 ‘바비 문화’에 향수를 느끼는 관객이 한국엔 비교적 적을 수밖에 없다.
<바비>가 페미니즘에 관한 주제의식이 뚜렷한 작품인 것은 사실이다. 만약 페미니즘을 다룬 영화가 한국 영화 시장에서 실패를 거듭해 왔다면 가디언의 분석은 일견 타당한 측면이 있다. 시간을 4년 전으로 되돌려 보자. <바비>보다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웠으면 내세웠지, 그 주제의식이 미약하다고 볼 수 없는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개봉했다. 한국 출판 시장에 좀처럼 보기 힘든 단권 판매 부수 100만 부를 돌파한 원작을 바탕으로 빠르게 영화화된 작품이다. <82년생 김지영>은 극장에서만 350만이 넘는 관객이 관람했다. 흥행 성공이었다.
가디언지는 이런 접근 없이 페미니즘만 운운했다. <바비>를 관람하면 페미니스트로 낙인찍힐까 두려워하는 이들을 걱정하는 가디언지에게 <82년생 김지영>을 관람한 관객들은 어떤 의미일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결론을 정하고 꿰어 맞추기 시작하면 확증 편향만 강화된다. 난 페미니즘을 잘 모른다. 모르니까 조심스럽다. 조심스러운 만큼 더욱더 알아봐야 한다. 모든 주제가 다 그렇다. 페미니즘뿐만이 아니다. 조심성을 잃는 순간 촌극이 빚어진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전화 몇 통 돌리고 기사 써 내려간 것으로 강하게 추정되는 누구처럼 말이다.
23.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