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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롤로 Aug 21. 2023

지지향(紙之鄕)에서

지지향(紙之鄕)에서 보낸 하룻밤

입추(立秋)가 지났지만 더위가 가실 기미를 보이지 않는 늦여름이었다. 하늘은 여전히 뜨겁게 달궈져 있고, 몸을 감싸는 습기는 여전히 찐득찐득하여 마치 길가에 떨어진 사탕이 눅눅하게 바닥에 달라붙듯 온몸이 열기와 찐득함으로 가득한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8월 안으로 써내야 할 글도 있고, 그런 더위를 피하기에 적합한 곳이 어디 없을까 하며 찾다가 문득 '지지향'을 떠올렸다. 한적한 곳에서 책과 함께 이 뜨거운 여름을 보낸다면 하루 이틀의 피서(避暑)만으로도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꽤나 많은 힘을 받아서 돌아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즉흥적으로 지지향 게스트 하우스를 예약했다. 


종이 지(紙), 어조사 지(之), 고향 향(鄕). 종이의 고향이라고 명명된 이곳은 파주 출판단지 내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다. 더 찾기 쉽게 말하자면 지혜의 숲과 함께 자리한 게스트하우스다. 책이라는 연결고리 안에 많은 사람들이 지혜의 숲, 파주 출판단지를 찾듯 이곳도 책이라는 연결고리로 많은 사람들을 모으는 곳이다. 작은 방에 작은 침대와 욕실, 그리고 작은 책상을 가진 단출한 방. 종이가 주인공이듯 TV가 없는 이곳. 그게 내가 찾은 게스트하우스 지지향(紙之鄕)이다. 


며칠, 몇 달을 잡고 있는 글이 하나 있다. 써야지 써야지 하며 만들어낸 뼈대만 대여섯 가지지만 살을 붙이지 못하고 있기를 몇 달. 그것이 업(業)인 사람이야 어느 자리에 있든, 어느 시간에 있든 그것을 해내야 하고 결국엔 해내니 큰 문제는 없겠지만, 지금 당장은 글을 쓴다는 것이 내게 억지로 강요된 것도 아니요. 내 삶의 부수적인 행동의 하나인 것인지라 생각보다 쉬이 써지지 않는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써야 한다는 어떤 강박은 마치 바닥에 눌어붙은 사탕의 잔해와도 같아서 쓴다는 의지와 행동의 실행으로 그 사탕을 떼어내야 하지만 실제로는 행하지 않는 계속된 회피(回避)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아, 이대로는 안된다. 어떤 결단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장소를 옮겨볼까? 왠지 그러면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공부 못하는 사람들이 장소, 시간, 분위기를 탓한다고들 하는데 나는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니 한 번 탓해 봐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무작정 예약을 했고 지지향에 도착해서 든 생각은 "어쩌면 될 것도 같은데?"였다. 지지향을 이용하는 이용객들에게 제공되는 24시간 북카페 '문발살롱'에 내려가 자리를 탐색했다. 전면 창으로 바깥을 바라보며 앉을 수 있는 자리, 저 자리에 앉으면 어떤 글이든 써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쓰다가 막히면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며 머릿속을 정리하고 다시 쓰고, 쓰다 막히면 해가 지며 색색이 물드는 건물의 벽을 바라보며 머리를 식히고 다시 쓰고, 왠지 그렇게 하면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결국 눈치 게임에서 승리한 나는 원하는 자리에 앉았고 그 자리에서 새벽 1시까지 머물렀다.


새벽 1시가 되니 '문발살롱'에 남아 있는 사람은 나와 중년의 여성분 한 분뿐이었다. 결국 완성해내지 못했지만 뼈대에 장기 정도는 붙이고 있던 와중이었는데, 어느 순간 자판을 타닥타닥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 여성분도 무언가를 쓰고 계셨다. 문득 왜 여기 오셨을까, 무엇을 쓰고 계실까, 직업이 작가일까 많은 질문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생각을 접고 다시 내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타인의 노트북 자판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 순간부터 오늘은 여기까지겠구나 하고. 노트북을 접고 읽다만 책을 펼쳤다. 남은 커피와 남은 페이지를 확인하고 슬슬 페이지를 넘기며 결국은 책을 다 읽었다. 노트북과 책을 가방에 주워 담고 붉게 충혈된 눈까지 챙기며 '문발살롱'을 나온다. 뒤로 여전히 무언가를 쓰고 있는 여성분이 보인다. 


다음날 아침 조식을 먹고 일찍 체크아웃 했다. 피서(避暑)를 위해서, 회피(回避)를 마주하기 위해서 찾은 곳에서 굉장히 좋은 시간을 보내고 왔다. 잘 피하고 잘 마주친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또다시 도망치듯 살 테지만 어쨌든 조그마한 실마리라도 찾아 돌아왔으니, 그 실을 따라 조금씩 조금씩  길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종이에게 고향이 있듯 나에게도 언제고 찾아갈 상징적인 고향이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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