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안와일단씀.

불면의책ㅋ

by 쥐석경

미안하다. 이거 보여주려고 어그로 끌었다.


비석에 적힌 글귀였다. 나는 지금 박물관에서 비석을 보고 있는 중이다. 고인이 된 롬아쥐는 컴퓨터 바탕화면에 유서.hwp라는 한글 문서를 하나 남겼는데 한컴 뷰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 유족이 열람하지 못했다고 한다. 경찰은 하드디스크를 수거해 파일을 열어 유족에게 프린트해 주었고 그걸 읽은 유족(7개월된 고양이)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밥그릇을 긁었다고 한다. 다행히도 사료는 일주일 분 정도 남아 있었고 평소 동물을 좋아하던 경찰이 롬아쥐의 유족을 거두기로 했다. 한 사람이 죽었지만 세상은 평화로웠고 그의 죽음에 슬퍼하는 이는 없었다.


문득 나는 그의 죽음을 돈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ㅏㄹ았다. 아무도 술퍼하지 않는 주긍ㅁ.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은, 태어날 때 모두가 기뻐하고 죽을 때 모두가 슬퍼할 수 있는 삶을 살라고 했지만 내 죽음으로 누군가가 슬퍼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슬펐다. 그래서 나는 죽게 된다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홀로 죽기로 다짐했다. 그게 이 세상에 남겨진 이들을 위한 마지막 배려니까.


롬아쥐가 누구든간에 나는 그의 이상적인 죽음에 매료되었고 비문에 적힌 글귀도 몹시 마음에 들었다. 큐레이터는 내게 롬아쥐의 작업실을 본딴 미니어처를 소개해줬지만 죽음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힌 나에겐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박물관을 나간 후로도 줄곧 그의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의 비문은 정말 비문이었다. 어그로를 끈다고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문장은 어그로를 끌기에 적절하지 않았다. 그에겐 문재가 없었다. 하지만 닿을 수 없는 진실을 향한 갈망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진실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 이 세상을 구축하는 중대한 법칙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나만 느낀 게 아니었다.


석가의 가르침을 공부하던 일순이가 복귀한 날, 우린 모처럼 카페에 갔다. 그곳은 일순이가 삼수하던 시절에 공부하려고 자주 가던 곳이었는데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굉장히 쓰고 맛없기로 유명했다. 일순이는 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두 잔 시켰다. 얻어먹는 입장이라 다른 메뉴를 선택할 권리는 없었다. 그게 가장 싼 메뉴이기도 했고. 아무튼 더럽게 맛없는 커피도 누군가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음료라는 걸 모를 만큼 무식하지 않던 나는 고통을 삼키며 공짜 커피를 맛있어 보이게 먹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일순이가 그 카페에서 라떼를 주문했다. 나는 그의 심경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 감히 짐작할 수 없어 벙찐 채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일순이는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롬아쥐에겐 실체가 없어. 피상적인 관념만 존재할 뿐이지.


나는 하마터면 마시고 있던 라떼를 뿜을 뻔했다. 도대체 무슨 개소리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내가 커피를 뿜으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여태껏 한 방울도 남기지 않은 관용적 행동에 모순되었기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당혹감을 감추려 끙끙댔다.


사바나는 고독하지. 그렇지만 사하라 사막은 풍요롭고 쾌활함이 넘치는 젊음의 장소야.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걸까? 우리는 어쩌면 지구가 아니라 외계에서, 그러니까 우리 은하의 범위를 벗어난 아득히 먼 곳에서 기인한 게 아닐까? 어쩌다가 소행성과 충돌해 고향의 별이 산산조각 나고, 그 조각이 날고 날아서 이 곳까지 온 거라면?


일순이의 우울한 목소리는 12월의 어느 겨울날을 떠오르게 했다. 그 겨울, 나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기숙사에서 촛불 하나에 의지한 채 추위와 배고픔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친구들의 생사는 알 수 없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주위는 무너진 건물의 잔해로 인해 막힌 상황이었다. 인간은 죽음을 선택할 수 없다는 신념만이 나를 이끌고 있었으며 나는 누군가에 의해 구조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순간, 하늘에서 빛이 쏟아졌고 밧줄이 내려왔다. 은하였다.


이제 자도 괜찮아. Time for the moon night.


은하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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