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망각의 동물
원래 회복력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명의를 만났던 것인지, 그렇지도 않으면 사실 너무 사소한 수술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회복이 빨랐다. 수술 후 2주 후 첫 검진을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 수술 부위가 아무는 속도에 놀랄 정도였다. 그래서 원래 수술 후 검진을 두 차례 보는 게 일반적이지만 나의 경우에는 오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했다. 특별히 이상이 생긴다면 그때 방문하라는 거였다. 너무 기뻤다. 수술 부위가 빨리 회복되고 있다는 소식도 반가웠고 더 이상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도 기분 좋았다. 그래서 무슨 상이라도 받은 것처럼 싱글벙글해져서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잘 회복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나자 그때까지 철저히 지켜오던 생활 습관이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수술 후 첫 일주일 동안은 정말 좌욕을 열심히 했다. 화장실 갈 때마다 좌욕을 하고, 그 사이사이에도 몇 번씩 했다. 비데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용변을 보고 나면 샤워기를 사용해 깨끗이 씻었다. 그러고 나면 다시 좌욕을 했다. 그래서 화장실에 들어가면 시간이 오래 걸렸다. 어떨 때는 30분이나 있기도 했다. 수술 후에는 괄약근에 무리하게 힘을 주면 안 되기 때문에 자연히 화장실에 자주 들락거렸다. 한번 들어갈 때마다 20-30분씩 있다 보니 거의 하루의 1/3 정도는 화장실에서 보냈다. 너무 화장실을 자주 가다 보니 힘이 빠질 정도였지만 그래도 성실하게 꼬박꼬박 들어갈 때마다 좌욕을 했다. 마치 살 길은 좌욕밖에 없다는 듯이 좌욕에 열심이었다.
원래 좌욕은 건강에 좋다. 치질 환자의 경우 특히 좋은데, 좌욕을 하면 괄약근 주변을 부드럽게 이완되어 통증이 완화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꼭 치질이 아니더라도 평소에도 좌욕을 자주 하면 항문을 깨끗하게 관리할 수 있기 때문에 좋다. 여성의 경우 하체가 따뜻하면 좋아서 남성보다 더 권장한다. 하지만 수술을 받기 전에는 바쁘고 번거롭다는 핑계로 거의 하지 않았다. 좌욕기는 있었지만 욕실 한 구석에 세워두고는 해가 바뀌어도 손대지 않았다. 보다 못한 남편이 쓰지 않을 거면 버리면 안 되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그러다가 수술 전 항문 소양증으로 괴로워지기 시작하면서 다시 좌욕을 하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간증이지만, 좌욕은 정말 효과가 있었다. 그동안 좌욕에 대해 들었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좌욕을 하고 나면 확실히 항문이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는데, 그뿐만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가려움증, 그리고 수술 후에는 통증도 확실히 좀 덜한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수술 후 병원에 검진을 가기까지 2주 동안 좌욕을 열심히 하며 생각했다. ‘앞으로는 규칙적으로 좌욕을 해야지.’
그러나, 통증도 점차 사라지고 병원에서도 올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듣고 나자, 좌욕을 한다고 화장실에 앉아 있는 시간이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변기 위에 앉아 스마트폰은 잘 보면서도 따뜻한 물을 채워 좌욕기 위에 앉아 일정 시간 동안 앉아 있는 건 번거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좌욕이 뜸해지더니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수술 후 2달이 지난 시점에서는 부끄럽게도 좌욕을 거의 하지 않는 생활로 되돌아갔다.
되돌아간 것은 좌욕 습관만이 아니었다. 치질 수술을 받기 전에 결심했던 금주, 건강 식단에 대한 결심 모두 흐려졌다. 인간의 기억이 얼마나 빨리 달아날 수 있는지 놀랄 지경이었다. 브런치 북 연재를 하며 간신히 그때의 기억을 끄집어내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이렇게 연재 글을 남기는 것에 감사한다. 사실 매주 글을 쓰며 한편씩 글을 완성시키는 게 괴로웠다. 그러나 글을 쓰려고 했기에 그때를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치질 수술을 받으며 내가 느꼈던 기분, 남이 보기에는 사소하고, 심지어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부위의 문제여도 당사자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경험, 실제보다 상상만으로 더 공포에 질릴 수 있다는 깨달음, 그리고 진정한 휴식, 내가 바라는 휴식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던 병원에서의 시간들을 다시 꺼내 볼 수 있었다.
이 글을 쓴 김에 오늘은 오랜만에 좌욕을 다시 해 봐야겠다. 느슨해진 마음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 추슬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