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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한 치질 경험기 7

가장 단순한 것을 바라는 시간

by 크림동동


병원의 생활은 단순하다. 먹고 자는 생활의 반복이다. 바깥세상과 차단되기 때문에 신경은 온통 자기 몸에만 집중되게 된다. 처음에는 이것저것 해 보겠다고 책이랑 노트북을 챙겨 왔지만 이내 단순한 리듬에 항복하게 된다. 조금이라도 눈을 뜨고 있는 동안에는 핸드폰으로 검색을 하고 영상을 보는 게 다다. 그나마도 하지 않을 때는 잠을 자 버린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마치 미래의 요양원 생활을 미리 체험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없어지니까 자연스레 당장 눈앞에 있는 것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밥’ 같은 것 말이다. 밥이야 원래도 중요했지만, 별다른 낙이 전혀 없는 상황이 되자 사실상 유일한 관심사가 되다시피 했다. 사실 맛 차원에서 보자면 병원 밥은 관심을 둘 만한 대상이 아니다. 맛보다는 환자의 건강 회복이 우선이기 때문에 식단에서 너무 자극적이거나 소화가 안 되는 건 다 빠진다. 한마디로 ‘맛있을 만한’ 건 나오지 않는 식사다. 그래서 대개 병원 밥은 ‘밍밍하다’ 거나 ‘싱겁다’는 소리를 듣는다. 간단히 말해, ‘병원 밥은 맛이 없다.’


하지만 나는 병원 밥에 대한 기억이 나쁘지 않다. 내가 처음 병원 밥을 먹었던 것은 출산하고 나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였다. 산모에게 나오는 밥이어서 그런지 식사가 정말 훌륭했다. 산모에게 주는 식사인 데다가 병원 밥이기도 해서 미역국에 밥만 나올 줄 알았더니 갖가지 맛있는 반찬에, 그것도 모자라 끼니 사이에 간식까지 충실하게 제공되었다. 그 덕에 아기와 양수 무게가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퇴원할 즈음에는 몸무게가 출산 전으로 도로 회복되었을 지경이었다. 여담이지만 이렇게 병원 밥을 맛있게 먹다가 퇴원 후 시댁에서 몸조리할 때 시어머니의 영양만 가득한, 간 없는, 진짜 산모를 위한 밥을 먹자니 숟가락이 떠지지를 않아 혼났다. 하지만 이번에 치질 수술을 받은 병원은 실망스럽게도 대체로 ‘밥이 맛이 없다’는 평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떤 음식이 나올지 궁금했다.


첫날은 수술 당일이었기 때문에 죽이 나왔다. 하지만 밥만 죽으로 바뀌었을 뿐 국도, 반찬도 있었다. 첫 끼니에는 죽과 함께 숙주와 고기, 무가 들어간 국이 나왔는데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병원에서 환자를 위해 만드는 특별한 국이겠거니 하면서 먹었다. 맛은 담백하니 괜찮았다. 수술 때문에 전날부터 장을 비운 채 15시간이 넘어가던 차라 무얼 먹어도 맛있었겠지만, 그걸 고려한 상태여도 맛이 나쁘지 않았다. ‘괜찮은데?’라고 생각했다.

KakaoTalk_20250309_203451152.jpg 첫 끼니. 죽과 두부, 갈치 구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와 숙주, 쇠고기국.

다음 날부터는 밥이 나왔다. 그런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엄밀히 말해서 크게 입맛을 돋운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맛이 없지도 않았다. 하지만 식판이 전체적으로 허여멀금했다. 딱히 빨갛다거나 파랗고 노란색이 보이지 않았다. 즉, 맵거나 간이 센 음식이 없었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맛이 심심했다. 점심도, 저녁도 그랬다. 그나마 다채로운 것이 아침이었다. 귤도 있고 계란 스크램블도 나왔다. 영국 음식이 대체로 맛이 없는데 그나마 아침이 가장 맛있다고 하더니, 영국으로 여행 온 것도 아닌데 병원 밥은 아침이 가장 맛있다고 느꼈다.

KakaoTalk_20250309_203451152_01.jpg 두번째 끼니.

KakaoTalk_20250309_203451152_02.jpg 입원 둘째 날 아침. 그나마 색이 다채롭다. 소화를 돕기 위해 요거트도 나왔다.
KakaoTalk_20250309_203451152_03.jpg 둘째 날 점심은. 비빔밥과 유부 버섯국. 식판이 허여멀금하다.
KakaoTalk_20250309_203451152_04.jpg 둘째 날 저녁. 색깔이 알록달록해서인지 그나마 가장 맛있었던 식사.
KakaoTalk_20250309_203451152_05.jpg 퇴원하는 날 아침 식사. 역시 색이 다채로우면 맛도 좋았다.


그 와중에도 첫 끼에 먹은 음식이 무엇인지 계속 궁금했다. 다른 음식들은 대충 무엇인지 알 수 있었는데 첫 끼니의 국만은 도무지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계속 골똘히 생각하다가 입원 이틀째에 갑자기 깨달았다. 그것은 ‘고추기름을 뺀 육개장’이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눈앞에 갑자기 냉장고가 보였다. 원래 병실마다 하나씩 두는 작은 냉장고였다. 첫날에는 누워만 있느라고 미처 보지를 못했고 그 이후에도 침상 둘레에 쳐 둔 커튼 때문에 눈에 띄지 않았던 거였다. 내가 주목한 건 냉장고보다는 냉장고 문에 붙어 있는 일주일 식단표였다. 거기에 내 추측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내가 입원한 날짜의 점심 식사 식단에 ‘육개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마침내 궁금증이 풀리자 속이 시원했다. 기쁘기까지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스웠다. 국의 정체를 안 게 이렇게 속 시원할 일인가.


평소의 나는 굉장히 ‘형이상학적인’ 사람이다. 생각이 많다 못해 늘 온갖 쓸데없는 걱정까지 하느라고 머리가 개운할 날이 없다. 당장 걱정거리가 없으면 미래의 걱정까지 끌어다 미리 한다. 그런 내가 병원에 들어온 순간부터 오로지 생각하는 거라고는 ‘마취가 풀리면 수술 부위가 얼마나 아플까’, ‘첫 소변이 무사히 나올까’, ‘언제 첫 배변을 하게 될까’, ‘다음 식사로는 뭘까’ 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갑자기 지극히 육체적 본능에만 충실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이런 나 자신이 낯설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했다.


‘단순한 삶’ ‘느리게 사는 삶’에 대한 예찬은 차고도 넘치게 보고 들었다. 하지만 실천하기는 늘 어려운 법이다. 늘 바쁘게 지내지 않으면 불안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러한 삶 속으로 떨어졌다. 할 생각이라고는 오로지 내 몸뿐이다. 그래서일까, 쓸데없는 걱정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아서인지 몸의 회복이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어느 정도였냐면 회진하러 온 의사 선생님이 놀랄 정도였다. 선생님은 수술 부위를 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계속 이렇게만 아물면 딱 좋겠는데 말입니다.” 그 말만으로도 그동안의 지루한 시간이 보람 있었다. 정말로 걱정과 잡생각은 머리만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에너지도 잡아먹는 모양이다.


이제 남은 과제는 딱 하나였다. 첫 배변. 배변 후의 고통이 지옥이라는 말은 누누이 들었다. 하지만 그 고통 이전에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첫 배변을 하는 일. 나는 퇴원하기 전에 꼭 첫 배변을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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