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배변의 기쁨
‘카타르시스’라는 말이 있다. 일반적으로 문학 작품이나 연극, 영화를 이야기할 때 많이 언급된다. 대개 답답한 상황이 해소되고 속이 뻥 뚫리는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을 일컫는다. 국어사전에 나온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비극을 봄으로써 마음에 쌓여 있던 우울함, 불안감, 긴장감 따위가 해소되고 마음이 정화되는 일.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詩學)≫에서 비극이 관객에 미치는 중요 작용의 하나로 든 것이다.
2. 정신 분석에서, 마음속에 억압된 감정의 응어리를 언어나 행동을 통하여 외부에 표출함으로써 정신의 안정을 찾는 일. 심리 요법에 많이 이용한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의 그리스어 원래 뜻은 ‘설사’라는 의미이다.
뭐, 설사라고? 갑자기 멋있어 보이던 단어가 달리 보인다. 왠지 냄새도 나는 것 같다.
뒷걸음질 치기 전에 잠시 설사할 때를 떠올려 보자. 꽉 막힌 장이 뚫리면서 이내 속이 시원해진다. 카타르시스란 말은 그렇게 설사할 때처럼 속이 뻥 뚫리는 감정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치질 경험담에 갑자기 설사와 카타르시스 이야기가 끼어든 이유는, 첫 배변에 성공했을 때 바로 머릿속에 떠올랐던 단어가 ‘카타르시스’였기 때문이다. 그 순간의 시원함이란 정말 이루 다 말로 할 수가 없었다. 순수한 육체적인 기쁨이었다. 정신적인 면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카타르시스라는 단어가 정신적인 후련함을 표현하는 데 주로 쓰이지만 그 시초는 몸이 느끼는 시원한 감각이라는 사실이 절로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 행복감은 처음이었다. 안도감, 시원함, 상쾌함. 그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그간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던 모든 고민거리가 다 하찮게 느껴졌다. 지금이라면 뭐든지 다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까지 읽으면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치질 수술 후 첫 배변이 그렇게 아프다던데 그럼 아프지 않았던 건가?’ 그럴 리가! 당연히 아팠다. 하지만 배변을 했다는 기쁨이 그 고통을 넘어섰다.
치질 괴담의 정점은 첫 배변이다. 흔히 ‘항문에서 수박이 나오는 것 같다’ 는 말로 그 고통을 표현한다. ‘얼마나 아프려나.’ 곧 다가올 고통의 순간을 기다리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병실에 누워 있으려니 지옥이 따로 없었다. 매 순간 상상 속에서 고통의 크기는 커져만 갔다. 하지만 의외의 문제에 부딪혔다. 변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첫 소변이 수술 당일 저녁에 쉽게 나왔던 데 비해 변은 소식이 없었다. 수술 전날부터 아무것도 먹은 게 없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신경이 쓰였다. 수술 후 너무 오랫동안 변이 나오지 않으면 항문이 오므라든 상태로 아물어서 나중에 더 크게 고생한다고 했다. 심한 경우 항문이 찢어지기도 한다는 거였다. 수술 전 읽었던 각종 후기에서도 잘 먹어야 한다고, 그래야 화장실 가는 게 수월하다고 했다. 그래서 잘 챙겨 먹었다. 식판을 싹싹 비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평소 먹는 양과 비교하자면 정말 열심히 챙겨 먹은 셈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먹었는데도 소식이 없었다.
아무래도 운동량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 침대에서 내려와 복도를 걸었다. 하지만 복도랄 것도 없는 공간이어서 몇 바퀴 돌아도 20분이 고작이었다. 할 수없이 침대로 돌아오면 곧 곯아떨어졌다. 그래서 입원 이틀 만에 나는 곰돌이 푸처럼 통통해졌다. 야속하게도 여전히 내 뱃속은 소식이 없었다. 그렇다고 화장실에서 오래 힘을 줄 수도 없었다. 아프기도 하거니와 너무 힘을 주면 수술 부위가 찢어지는 것은 물론 치질이 재발할 수도 있다는 거였다.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걸까? 힘을 주라는 걸까, 말라는 걸까. 내 평생 변을 보는 데 이렇게 신경이 쓰이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최후의 수단으로 ‘관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치질 수술을 한 환자의 경우 병원에서도 필요하면 관장을 허락했다. 힘을 과하게 주다가 수술 부위가 덧나느니 차라리 관장을 하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변이 안 나오면 관장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느긋하게 있었다. 그런데 옆 침대의 할머니가 입원 마지막 날까지 변을 못 보고, 관장까지 했는데도 끝내 실패한 채로 퇴원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걸 보니 겁이 더럭 났다. 관장까지 해도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갑자기 온 신경이 장과 엉덩이로만 향했다. ‘언제쯤 소식이 오려나. 언제쯤 나오려나.’ 뱃속의 신호에만 귀를 기울였다.
내가 이렇게까지 첫 배변에 목을 매었던 것은 첫 배변이 아프다고 해서이기도 했지만, 집에 돌아가면 그 순간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게 더욱 무서웠기 때문이다. 화장실 손잡이를 잡고 운다는 고통이 닥쳐왔을 때 남편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뻔했다. 병원에 있다고 해서 얼마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남편보다는 의지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간호사, 의사 선생님이 있는 환경에서 치질 수술의 가장 큰 고비를 넘기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초조해졌다.
둘째 날 저녁 회진 때 나는 의사 선생님께 변이 안 나와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다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제 이틀째인데요? 당연하지요. 퇴원할 때까지 기다려보세요.”라고 했다. 머쓱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지금 관장하면 안 될까요?” 하고 물어봤다. 의사 선생님은 “퇴원할 때까지 소식이 없으면 그때 해 봅시다.”라고 말하곤 자리를 뜨셨다. 이제 퇴원 때까지 하룻밤 남았다. 나는 기도까지 드렸다. ‘제발 퇴원 전에 첫 배변을 보게 해 주세요.’
마지막 날 새벽이었다. 뭔가 소식이 왔다. 부리나케, 하지만 조심조심 화장실로 들어갔다. 변기에 앉아 힘을 주었다. 수술 부위에 고통이 밀려들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손을 꽉 쥐고 힘을 주고, 숨을 쉬고, 힘을 주고 숨을 쉬었다. 그러고 있으려니 마치 아이를 낳는 것 같았다. 속으로 장한테 말까지 걸었다. ‘잘하고 있어. 조금만 더 힘 내!’ 다시 한번 힘을 주는 순간, 쑥! 뭔가 나왔다. 드디어 성공했다!
아, 이렇게 기쁠 수가! 귀에서 환호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얼굴에 풀리고 웃음이 번져 나가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너무 좋아 머릿속이 말갛게 되었다. 평소 머리를 어지럽게 하던 모든 것들이 그 순간에는 모두 하찮게 느껴졌다. ‘그까짓 것들이 뭐라고!’ 지금 내가 건강하게 배설을 할 수 있고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비하면 전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장소가 화장실 변기 위라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나는 진정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를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얼마나 기뻤던지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담당 간호사에게 “나, 성공했어요!”하고 알렸다. 간호사도 같이 “어머, 정말요?”라며 덩달아 기뻐해 주었다. 마침 나를 데리러 온 남편에게 활짝 웃으며 “나, 성공했어!” 했다. 남편은 엉겁결에 따라 웃으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눈치였다. 고작 화장실에서 성공한 걸로 저렇게 기뻐할 일인가? 남편 속마음이 들리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웃음만 나왔다.
물론 그 기쁨은 곧 사그라들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배변은 한 번 하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매일 해야 한다. 게다가 치질 수술 후에는 오래 힘을 주면 안 되기 때문에 한 번에 시원하게 보는 게 아니라 여러 번 화장실을 들락날락할 수도 있다. 그때마다 기다리고 뒤처리를 하고 좌욕을 하려니 이만저만 번거롭고 힘든 게 아니었다. 이러한 일상의 번거로움 속에 그때의 기쁨은 빠르게 기억 속에 묻혔다.
그러나 묻힐지언정 잊히지는 않았다. 처음 경험한 카타르시스가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순수하게 육체적 해방감에서 오는 환희와 넘쳐나는 자애로움, 그때까지 나는 내 속에 그런 온화한 감정이 존재하는 줄도 몰랐다. 평소 내가 그런 온유한 상태로 있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쓸데없는 소모적 걱정과 고민이 내 마음을 옥죄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계기가 무엇이든 일시적이나마 그 사슬을 치웠을 때 내 모습은 스스로 보기에도 마음에 들었고 심지어 사랑스럽기조차 했다. 비록 찰나이기는 했지만 이대로 사라지게 돌 수는 없었다. 그래서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기분을 조금이라도 타인과 공유하고 싶었다. 내 브런치 첫 연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