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진지한 치질 경험기 8

첫 배변의 기쁨

by 크림동동

‘카타르시스’라는 말이 있다. 일반적으로 문학 작품이나 연극, 영화를 이야기할 때 많이 언급된다. 대개 답답한 상황이 해소되고 속이 뻥 뚫리는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을 일컫는다. 국어사전에 나온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비극을 봄으로써 마음에 쌓여 있던 우울함, 불안감, 긴장감 따위가 해소되고 마음이 정화되는 일.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詩學)≫에서 비극이 관객에 미치는 중요 작용의 하나로 든 것이다.

2. 정신 분석에서, 마음속에 억압된 감정의 응어리를 언어나 행동을 통하여 외부에 표출함으로써 정신의 안정을 찾는 일. 심리 요법에 많이 이용한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의 그리스어 원래 뜻은 ‘설사’라는 의미이다.


뭐, 설사라고? 갑자기 멋있어 보이던 단어가 달리 보인다. 왠지 냄새도 나는 것 같다.


뒷걸음질 치기 전에 잠시 설사할 때를 떠올려 보자. 꽉 막힌 장이 뚫리면서 이내 속이 시원해진다. 카타르시스란 말은 그렇게 설사할 때처럼 속이 뻥 뚫리는 감정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wc-1210963_1280.jpg



치질 경험담에 갑자기 설사와 카타르시스 이야기가 끼어든 이유는, 첫 배변에 성공했을 때 바로 머릿속에 떠올랐던 단어가 ‘카타르시스’였기 때문이다. 그 순간의 시원함이란 정말 이루 다 말로 할 수가 없었다. 순수한 육체적인 기쁨이었다. 정신적인 면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카타르시스라는 단어가 정신적인 후련함을 표현하는 데 주로 쓰이지만 그 시초는 몸이 느끼는 시원한 감각이라는 사실이 절로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 행복감은 처음이었다. 안도감, 시원함, 상쾌함. 그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그간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던 모든 고민거리가 다 하찮게 느껴졌다. 지금이라면 뭐든지 다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까지 읽으면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치질 수술 후 첫 배변이 그렇게 아프다던데 그럼 아프지 않았던 건가?’ 그럴 리가! 당연히 아팠다. 하지만 배변을 했다는 기쁨이 그 고통을 넘어섰다.

치질 괴담의 정점은 첫 배변이다. 흔히 ‘항문에서 수박이 나오는 것 같다’ 는 말로 그 고통을 표현한다. ‘얼마나 아프려나.’ 곧 다가올 고통의 순간을 기다리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병실에 누워 있으려니 지옥이 따로 없었다. 매 순간 상상 속에서 고통의 크기는 커져만 갔다. 하지만 의외의 문제에 부딪혔다. 변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첫 소변이 수술 당일 저녁에 쉽게 나왔던 데 비해 변은 소식이 없었다. 수술 전날부터 아무것도 먹은 게 없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신경이 쓰였다. 수술 후 너무 오랫동안 변이 나오지 않으면 항문이 오므라든 상태로 아물어서 나중에 더 크게 고생한다고 했다. 심한 경우 항문이 찢어지기도 한다는 거였다. 수술 전 읽었던 각종 후기에서도 잘 먹어야 한다고, 그래야 화장실 가는 게 수월하다고 했다. 그래서 잘 챙겨 먹었다. 식판을 싹싹 비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평소 먹는 양과 비교하자면 정말 열심히 챙겨 먹은 셈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먹었는데도 소식이 없었다.

hygiene-9260543_1280.jpg


아무래도 운동량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 침대에서 내려와 복도를 걸었다. 하지만 복도랄 것도 없는 공간이어서 몇 바퀴 돌아도 20분이 고작이었다. 할 수없이 침대로 돌아오면 곧 곯아떨어졌다. 그래서 입원 이틀 만에 나는 곰돌이 푸처럼 통통해졌다. 야속하게도 여전히 내 뱃속은 소식이 없었다. 그렇다고 화장실에서 오래 힘을 줄 수도 없었다. 아프기도 하거니와 너무 힘을 주면 수술 부위가 찢어지는 것은 물론 치질이 재발할 수도 있다는 거였다.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걸까? 힘을 주라는 걸까, 말라는 걸까. 내 평생 변을 보는 데 이렇게 신경이 쓰이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최후의 수단으로 ‘관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치질 수술을 한 환자의 경우 병원에서도 필요하면 관장을 허락했다. 힘을 과하게 주다가 수술 부위가 덧나느니 차라리 관장을 하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변이 안 나오면 관장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느긋하게 있었다. 그런데 옆 침대의 할머니가 입원 마지막 날까지 변을 못 보고, 관장까지 했는데도 끝내 실패한 채로 퇴원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걸 보니 겁이 더럭 났다. 관장까지 해도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갑자기 온 신경이 장과 엉덩이로만 향했다. ‘언제쯤 소식이 오려나. 언제쯤 나오려나.’ 뱃속의 신호에만 귀를 기울였다.


내가 이렇게까지 첫 배변에 목을 매었던 것은 첫 배변이 아프다고 해서이기도 했지만, 집에 돌아가면 그 순간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게 더욱 무서웠기 때문이다. 화장실 손잡이를 잡고 운다는 고통이 닥쳐왔을 때 남편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뻔했다. 병원에 있다고 해서 얼마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남편보다는 의지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간호사, 의사 선생님이 있는 환경에서 치질 수술의 가장 큰 고비를 넘기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초조해졌다.


둘째 날 저녁 회진 때 나는 의사 선생님께 변이 안 나와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다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제 이틀째인데요? 당연하지요. 퇴원할 때까지 기다려보세요.”라고 했다. 머쓱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지금 관장하면 안 될까요?” 하고 물어봤다. 의사 선생님은 “퇴원할 때까지 소식이 없으면 그때 해 봅시다.”라고 말하곤 자리를 뜨셨다. 이제 퇴원 때까지 하룻밤 남았다. 나는 기도까지 드렸다. ‘제발 퇴원 전에 첫 배변을 보게 해 주세요.’


마지막 날 새벽이었다. 뭔가 소식이 왔다. 부리나케, 하지만 조심조심 화장실로 들어갔다. 변기에 앉아 힘을 주었다. 수술 부위에 고통이 밀려들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손을 꽉 쥐고 힘을 주고, 숨을 쉬고, 힘을 주고 숨을 쉬었다. 그러고 있으려니 마치 아이를 낳는 것 같았다. 속으로 장한테 말까지 걸었다. ‘잘하고 있어. 조금만 더 힘 내!’ 다시 한번 힘을 주는 순간, 쑥! 뭔가 나왔다. 드디어 성공했다!


아, 이렇게 기쁠 수가! 귀에서 환호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얼굴에 풀리고 웃음이 번져 나가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너무 좋아 머릿속이 말갛게 되었다. 평소 머리를 어지럽게 하던 모든 것들이 그 순간에는 모두 하찮게 느껴졌다. ‘그까짓 것들이 뭐라고!’ 지금 내가 건강하게 배설을 할 수 있고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비하면 전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장소가 화장실 변기 위라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나는 진정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를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woman-1868817_1280.jpg


얼마나 기뻤던지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담당 간호사에게 “나, 성공했어요!”하고 알렸다. 간호사도 같이 “어머, 정말요?”라며 덩달아 기뻐해 주었다. 마침 나를 데리러 온 남편에게 활짝 웃으며 “나, 성공했어!” 했다. 남편은 엉겁결에 따라 웃으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눈치였다. 고작 화장실에서 성공한 걸로 저렇게 기뻐할 일인가? 남편 속마음이 들리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웃음만 나왔다.


물론 그 기쁨은 곧 사그라들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배변은 한 번 하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매일 해야 한다. 게다가 치질 수술 후에는 오래 힘을 주면 안 되기 때문에 한 번에 시원하게 보는 게 아니라 여러 번 화장실을 들락날락할 수도 있다. 그때마다 기다리고 뒤처리를 하고 좌욕을 하려니 이만저만 번거롭고 힘든 게 아니었다. 이러한 일상의 번거로움 속에 그때의 기쁨은 빠르게 기억 속에 묻혔다.


그러나 묻힐지언정 잊히지는 않았다. 처음 경험한 카타르시스가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순수하게 육체적 해방감에서 오는 환희와 넘쳐나는 자애로움, 그때까지 나는 내 속에 그런 온화한 감정이 존재하는 줄도 몰랐다. 평소 내가 그런 온유한 상태로 있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쓸데없는 소모적 걱정과 고민이 내 마음을 옥죄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계기가 무엇이든 일시적이나마 그 사슬을 치웠을 때 내 모습은 스스로 보기에도 마음에 들었고 심지어 사랑스럽기조차 했다. 비록 찰나이기는 했지만 이대로 사라지게 돌 수는 없었다. 그래서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기분을 조금이라도 타인과 공유하고 싶었다. 내 브런치 첫 연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07화진지한 치질 경험기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