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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한 치질 경험기 10

역지사지하는 삶

by 크림동동

다 아는 이야기지만 실제 상대방의 위치에 서보기 전에는 결코 상대방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몇 년 전 남편이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다. 진단 결과는 아주 초기였고 남편은 50대 초반의 비교적 젊은 나이였기 때문에 어느 모로 봐서도 결코 위험한 상태가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도 갑상선 암은 암 중에서도 착한 암이라며 나이 많은 사람의 경우 수술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주변에 성공담을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럴까. 나는 남편이 의연하게 대처해 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남편은 달랐다. 완전히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원래도 건강염려증이던 사람이 수술 이후에는 더욱 심해져 식단에 까다롭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한편으론 남편이 이해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짜증이 솟구쳤다. 남편이 너무 엄살이 심하고 유난을 떤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벌을 받은 걸까? 이제는 내가 남편의 입장이 되었다. 내가 항문 소양증으로 고생할 때 남편이 멀뚱한 얼굴로 있으니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비록 암과 치질은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내 고통을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할 때의 답답한 마음만은 그때의 남편과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제야 남편에 대한 미안함이 슬그머니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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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의 나는 선입견으로 무언가를 섣불리 판단하는 걸 경계한다. 아니, ‘그렇게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번 수술을 겪으며 깨달았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갑상선 암은 가벼운 암, 착한 암’이라는 허울 아래 감춰진 남편의 괴로움과 공포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내 경우로 넘어와서 이야기해 본다 해도, 나 역시 전에는 ‘치질’이라고 하면 ‘더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가려움증’이라고 하면 웃음부터 나왔다. 막상 치질 수술을 받게 되었을 때에도 각종 후기를 보고 쌓아 올린 이미지 때문에 미리 공포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실제 겪어보니 들었던 것과는 다 달랐다. 결국 ‘선입견’은 선입견일뿐 ‘실제’가 아니었던 거다. 그리고 이 차이를 아는데 ‘치질 수술’이라는 실제로 몸으로 느끼는 과정이 필요했다.


사실 사람들은 ‘이미지’와 ‘현실’이 틀린 걸 안다. ‘선입견’과 ‘실제’가 다르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단지 머리로 알 뿐이다. 현실에서는 대부분 선입견으로 많은 것을 판단해 버린다. 왜 그럴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귀찮다’는 게 가장 컸다. 대충 넘어가 버리면 편한 걸 왜 매번 일일이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야 하는가? 선입견으로 보고 살아도 별일 없지 않은가? 그렇게 나는 너울 아래 숨겨진 개개인의 고통을 외면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누구도 그 입장에 서 보기 전에 함부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아주 위험하고 심지어 무례하기까지 한 짓이다. 남편이 그때 얼마나 외로운 심정이었을지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뿐이다.


이 치질 수술은 내게 진정한 ‘역지사지’를 체험할 수 있었던 취중하고 고마운 기회였다. 이 기회에 다시 다짐해 본다.


‘함부로 선입견만으로 판단하지 말자.’


(지금까지 '진지한 치질 경험기'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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