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도 자기 색깔을 잃으면 사라진다
얼마 전 광화문 한 중국집에서 점심 모임이 있었다. 그 집은 서울 3대 탕수육 맛집으로 앞에 팻말까지 세워놨지만, 모임에 온 사람들 이날 식사 메뉴만 고르기로 했다. 메뉴판을 대충 흝어보는데 '우동'이란 글자가 눈에 걸렸다. 와락 반가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우동이란 글자에 반색한 사람은 나뿐, 모임의 다른 사람들은 우동이란 단어 자체도 못 본 눈치였다. 손으로 짚어줘도 여전히 '중국집'과 '우동'이란 조합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중국집 우동, 혹은 중화 우동은 앞의 수식어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일본 우동과는 다른 음식이다. 담백한 하얀 국물에 해물과 야채가 얹어 나오는 것이 특징인 면 요리인데 언뜻 보기엔 나가사키 짬뽕과 비슷하다. 혹자는 그래서 나가사키 짬뽕에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하지만, 그와는 달리 짜장면처럼 한국화된 중식 요리이다. 우리나라의 중화 우동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어서 일제 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38년에 나온 채만식의 소설 “태평천하”에도 ‘탕수육과 우동’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짜장면, 짬뽕과 더불어 서민들이 즐겨 찾는 중국집 음식이었지만 그 이후 점차 사라졌다. 우동의 인기가 시들해진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갈수록 얼큰한 음식을 선호하게 된 취향의 변화, 울면, 사천탕면 등 해물이 들어간 다른 중식 면 요리와 차별화가 힘들다는 점, 그리고 정통 일식 우동이 점차 인기를 얻은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해물을 싫어하는 입맛 탓에 어린 시절에는 우동을 먹어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이렇게 오랜 시간을 지나 다시 그 글자를 마주하니 반가운 마음에서라도 한번 먹어봐야겠다 싶었다.
그럼 과연 중화 우동의 맛은 어땠을까? ‘맛있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다. 해물은 고작 오징어 몇 가닥에 작은 새우 서너 마리 정도, 야채라야 배추 줄기 두어 가닥과 얇게 자른 호박 2조각을 제외하곤 온통 굵게 썬 양파뿐이었다. 양파가 얼마나 많았던지 양파만 걷어 먹다 배가 불러 면을 못 먹을 지경이었다. 전반적으로 실망스러웠다.
게다가 중화 우동이란 음식의 정체성조차 모호했다. 옆 사람이 시킨 백짬뽕과 모습도, 양도 너무 똑같아서 혹시 착각하고 잘못 준 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직원을 불러 물어보니 중화 우동과 백짬뽕은 베이스는 같지만 중화 우동에는 '조미료', 참기름, 계란, 그리고 전분물이 들어가는 게 다르다는 설명이었다. 국물 맛을 보니 정말 참기름의 맛과 향이 느껴졌다. 거기까지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직원은 중화 우동은 주로 아이들 용으로 많이 시키는 메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조미료'? '아이들 용'? 이 두 단어에 어쩐지 부풀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한편으론 중화 우동이 흐지부지 모습을 감춘 이유가 납득이 되기도 했다.
겉모습과 맛으로는 백짬뽕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고, 조미료와 전분을 넣어 시원하고 개운한 맛보다는 고소한 맛을 강조했으니 어른들의 입맛에는 아이들 용이라고 느낄 만도 했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먹기에는 해물과 야채가 많아 좋아할 만하지도 않았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닌 탓에 중화 우동은 슬그머니 사라진 거였다.
음식이든 사람이든 자기만의 색깔이 뚜렷하지 않으면 도태되기 마련이다. 중화 우동은 한때 짬뽕과 함께 해물이 들어간 개운한 맛과 저렴한 가격으로 서민의 입맛을 사로잡았지만, 짬뽕이 얼큰한 맛으로 점점 더 인기를 얻은 반면 중화 우동은 울면, 백짬뽕 등과 차별화하지 못해 결국 지금은 보기도 힘든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음식조차 자기의 정체성을 가지지 못하면 사라지기 마련이다.
다행히 중화 우동도 비로소 자기 색깔 찾기에 나선 모양이다. 요즘 중화 우동이 다시 중국집 메뉴판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과거 모호했던 정체성을 이제나마 찾으려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겨우 한 번 맛본 걸로 중화 우동의 맛에 대해 단정짓기에는 이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첫 집을 잘못 고른 걸 수도 있다. 내친김에 중화 우동 탐험을 떠나 보면 어떨까? 백짬뽕과 사천탕면, 울면과 그 외 해물이 올라간 수많은 면들 사이에서 중화 우동이 이번에는 과연 제 색깔을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