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 기분좋은 한 끼
'돼지국밥'하면 부산이 제일 먼저 떠오르지만 실은 밀양 역시 돼지국밥으로 유명하다.
두 국밥은 스타일도 틀리다. 하지만 이 두 가지의 비교는 내 능력 밖이다. 왜냐하면 나는 부산 돼지국밥을 먹어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부산이 고향이지만 '냄새나는 음식'이라면 질색을 하는 엄마 덕에 이때껏 '돼지국밥'을 먹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앞으로도 먹기 힘들 것 같다. 부산에 가면 친정에서 대부분을 지내는데, 친정에서는 당연히 엄마 밥을 먹거나 외식을 해도 부모님과 함께 간다. 그러니 돼지국밥을 먹으러 갈 틈이 없다.
그래서 '돼지국밥'과 나는 영영 인연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사람 일이란 모르는 거다.
명절 연휴가 길어 추석 지나 느긋하게 부산 친정으로 향했다. 차가 막힐 걸 걱정하다 보니 오히려 너무 일찍 출발해서 생각보다 빨리 내려가게 되었다. 부모님께는 오후나 되어야 도착할 거라고 말씀드렸는데 네비에 에 따르면 12시 좀 넘으면 벌써 부산에 도착할 모양새였다. 명절 친정행이라지만 이것도 여행이라면 여행인데 이대로 바로 부산으로 가기는 아쉬웠다. 그래서 점심도 먹을 겸 부산에 들어가기 전에 한 군데 들렀다 가기로 했다. 마침 시간은 12시가 가까워지고 있었고 아침을 일찍 먹은 터라 진작부터 출출한 터였다. 네비를 보니 밀양 IC가 코앞이었다. '밀양?' 왠지 뭔가 볼 것도 있고 맛있는 것도 있을 것 같았다. 번개 같은 속도로 폰을 열고 '맛집'을 검색하자마자 식당들이 주르륵 떴다. 대충 흩어보는데 이름 하나가 눈에 딱 들어왔다.
'산동 돼지국밥'
카카오 맵의 별점도 훌륭했고 리뷰 수도 많았다. 게다가 우리 차 위치에서 2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이 정도면 돼지국밥을 먹을 운명 아닐까? 비록 부산 돼지국밥은 아니지만 그 라이벌 국밥이라도 이렇게 돼지국밥에 입문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거였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남편이 다급하게 물었다.
"어쩔까? 밀양 IC로 진입할까 말까?'
나는 남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가자!"
나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식당으로 다가갈수록 먼저 눈에 띈 것은 주차장을 채우고도 모자라 길가에까지 주차되어 있는 차들이었다. '사람이 많은 곳인가 보다.' 흥분이 되기 시작했다. 과연 식당 앞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대기까지 해야 하나?' 마음이 급해졌다. 남편이 주차를 하는 사이 서둘러 식당으로 달려갔다. 이미 두어 팀이 식당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레슬링 선수 같은 두툼한 몸매에 사람 좋은 웃음을 띤 사장님에게 대기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자 여긴 대기표 같은 거 없다며 밖에서 기다리면 온 순서대로 불러준다고 했다. 대기 4번째라는 말을 듣고 돌아서는데 한 할머니가 계단을 오르며 사장님에게 말했다. "아, 일찍 온다꼬 왔는데 벌써 자리가 없네." 사장님은 허허 웃으며 "죄송합니다. 쪼매만 기다리세요." 했다. 그 말을 듣자 다시 한번 식당을 제대로 고른 것 같아 어깨가 으쓱해졌다.
15분 정도 기다리자 식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자리를 안내받은 후 음식을 주문했다. 메뉴는 단출했다. 돼지국밥과 비빔밥, 그리고 수육이 다였다. 마음에 들었다. 제대로 하는 식당이라면 괜히 힘 빠지게 이것저것 늘어놓지 않는 법이다. 남편은 돼지국밥을, 나는 비빔밥을 주문했다. 돼지국밥을 먹겠다고 결심했지만 아직 용기가 충분치 못한지 막상 '비빔밥'이라는 이름을 보자 그쪽으로 쏠렸다. 대신 남편 돼지국밥을 조금 맛보기로 했다.
마침내 음식이 나왔다. 처음 보는 밀양 돼지국밥은 과연 부산 돼지국밥과 달랐다. 부산 돼지국밥이 국밥 위에 수육처럼 썰린 고기가 얹어 있는 스타일이라면 밀양 돼지국밥은 고기를 잘게 썰려 있었다. 국물은 뽀얗지만 맑았다. 어떻게 보면 좀 맑은 설렁탕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단 기름기가 적고 담백해 보였다. 밥은 토렴식으로 국밥 안에 따뜻하게 말아져 있었다. 만약 밥이 더 필요하면 요청할 수 있었다.
비빔밥은 크게 말할 것이 없었다. 콩나물을 비롯해 무생채, 고사리 등이 둥글게 놓이고 가운데 커다란 계란 프라이가 놓인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당근처럼 화려한 색을 내는 나물이 빠져 있어 어딘지 경상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비빔밥에도 국밥 국물이 곁들여 나와 굳이 남편 국밥에 손을 댈 필요가 없었다.
고기와 밥이 빠진 순수한 국밥 국물은 더욱 맑아 보였다. 이제 보니 설렁탕이 아니라 사골 국물 같았다. 맛을 보니 더욱 그랬다. 어릴 때 엄마가 고아주던 곰국 맛이었다. 남편도 내 국을 맛보더니 내 말에 동의했다. 어떻게 돼지 국밥에서 사골국 맛이 나는지 신기했다. 국물을 먹으니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식당 외관도 식당 안도 음식도 모두 옛 생각이 나게 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따뜻한 시간이었다.
어느새 밥을 뚝딱 다 먹었다. 그사이 대기 손님은 더 늘어 있었다. 과연 사장님이 저 손님들을 다 기억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몰려드는 손님과 식당 안 서빙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사장님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릇을 들고 바쁘게 돌아다니면서도 단골인 듯한 손님들이 안부를 묻는 말에 일일이 답해주기까지 했다. 그렇게 오가는 대화 덕에 사장님에게 장성한 아들이 있다는 것과 그 아들이 제대를 했고 이제 제 밥벌이를 하며 앞가림도 하면서 곧 결혼까지 한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사장님의 얼굴에서 떠날 줄 모르는 웃음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잘 키운 자식과 손님이 가득 찬 식당, 그리고 정겨운 단골까지. 지금 사장님에게 세상 무엇이 부러울까? 아니, 어쩌면 이렇게 인심 좋은 사장님이기에 복이 들어오는지도 몰랐다.
우연히 들른 식당이었지만 좋은 기운을 한껏 받고 가게 되었다. 배도 마음도 든든하고 따뜻했다. 비단 국밥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장님의 인심 좋은 표정과 식당의 떠들썩한 활력 덕분이었다. 어쩐지 밀양이 좋아졌다. 내친 김에 밀양을 좀 더 돌아보기로 했다. 우리가 차를 빼자 다른 차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 자리에 들어왔다. 떠나면서 보니 식당 앞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기분 좋은 점심이었다. 식당을 방문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끼리라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