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 사는 이야기-마트 편
압구정에 집을 산 직후의 일이다. 압구정에 집을 샀다니까 지인들이 말했다.
“이제 매일 백화점에서 장 보겠네. 좋겠다.”
글쎄, 압구정 지역이 현대와 갤러리아, 두 개의 백화점을 품고 있는 건 맞지만 나에게 그 백화점들은 동네의 랜드마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백화점에서 장은커녕 빵이라도 산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다. 그렇다고 아예 백화점을 피해 다니는 건 아니다. 너무 더울 때나 화장실을 이용하고 싶을 때 가기는 간다.
나는 좀 ‘올드’한 사람이라 재래시장을 좋아한다. 그것도 규모가 큰 시장을 좋아한다. 골목 한 구역 정도의 작은 시장은 성에 차지 않는다. 둘이 살아 잘해 먹지도 않으면서 시장은 왜 이렇게 큰 곳만 고집하는지 모르겠다. 어릴 때 할머니 집이 시장에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시장이 클수록 볼거리가 많아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압구정에 이사 오기 전 살았던 동네는 전통 시장 러버인 나에게는 최상의 입지였다. 걸어서 갈 수 있는 시장이 3군데나 있었다.
그래서 압구정으로 이사 가게 되었을 때 가장 걱정되었던 건 ‘장은 어디서 보나?’ 하는 거였다. 내 걱정이 근거가 없는 건 아니었던 것이 압구정은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었고, 시내에는 원래 땅값이 비싸기 때문에 대형 마트가 들어설 수가 없다. 그럼 믿을 만한 건 중형 마트, 즉 동네 슈퍼뿐인데 그때까지 몇 번 지나가 본 압구정에서 그런 슈퍼를 본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지나가 본 입장에서 그런 것이고, 잘 찾아보면 어딘가에 슈퍼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렇게 큰 아파트 단지인데 그 사람들이 장 보는 슈퍼가 없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잘못 생각했다. 아무리 상가 골목 사이를 뒤지고 다녀도 마트는 그림자도 없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있긴 했다. 기업형 슈퍼가 두어 개 보이긴 했다. 그리고 ‘00 농수산물 마트’도 있었다. 하지만 규모가 너무 작았다. 이 정도로 저 많은 아파트 주민들에게 충분할 리가 없었다. 아니 주민들 이전에 내 성에도 한참 못 미쳤다. 그럼 어기 주민들은 도대체 다 어디서 식재료를 사서 먹고사는 걸까? 설마 다들 0팡에서 배달시키는 걸까?
“배달시켜요.”
압구정에 사는 지인의 말이었다. 궁금해하던 끝에 그녀에게 톡을 보내 어디서 장을 보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 ‘설마’가 진짜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그럼 정말 이 많은 주민이 모두 다 정말 새벽 배송과 택배로 두부, 야채, 고기를 받는다는 말일까? 새삼 문화충격에 머리가 어질어질한 참인데 그녀에게서 톡이 하나 더 왔다.
“야채는 0000에서 시키세요. 거기가 제일 신선해요.”
그녀의 친절한 팁이었다.
문화 센터 수업에서 만난 아가씨 수강생이 알고 보니 같은 아파트 주민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이 동네에 마트는 어디 있냐고 물어봤다. 하지만 그 수강생은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장은 엄마가 보기 때문에 자기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내가 괜찮다며 그 어색한 상황을 마무리하려고 하자 그 아가씨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부나 쓰레기봉투는 00 농산물 마트나 그 앞의 홈000 익스000에서 사면돼요.”
이미 내가 아는 곳들이었다. 그 이후 더 이상 주변에 ‘동네 마트’에 대해 묻지 않았다. 장 보는 문제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기로 했다.
현재의 근황 보고를 하자면, 다행히 나는 아주 장을 잘 보고 다닌다. 내가 개척한 ‘나만의 장 보는 루트’는 다음과 같다. 먼저 전통 시장을 이용하고 싶으면 경동 시장과 남성 사계 시장을 간다. 둘 다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하지만 집에서 버스 정류장도 가깝고, 시장 바로 앞에서 버스가 내리기 때문에 힘들지 않다. 시장에서는 주로 신선한 고기와 야채 위주로 산다. 특히 경동 시장의 경우 고기 품질이 아주 좋다. 그 외 라면을 비롯한 생필품 쇼핑은 지하철로 두 정거장 떨어진 대형마트로 간다. 여기 마트는 내 마음에 충분히 흡족할 만큼 클 뿐만 아니라 복합쇼핑몰 안에 있어 온갖 쇼핑을 한꺼번에 할 수 있다. 게다가 쇼핑몰이 역과 바로 이어져 있어 이래저래 매우 편리하다.
결과적으로 압구정에 살지만 백화점에서 장을 보지 않고도 잘 지내고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정말 이 동네에서 정말 백화점에서 장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나 역시 궁금하다. 저녁에 백화점에 가면 식품관이 붐비는 걸 보니 정말 이곳에서 장 보는 사람들도 있긴 한 모양이다. 하지만 당연히 모두 다 그런 건 아니다. 이곳에도 주말이면 단지마다 직거래 장터도 열리고 대한민국 어디나 그렇겠지만 택배 차량이 하루 종일 돌아다닌다. 정말 온라인 쇼핑이 대세인 것이다. 제일 놀라웠던 건 단지 안에 ‘재래시장’까지 있다는 거였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시장이 실제 있었고, 압구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여기서 주로 장을 봤다는 글을 보고 찾아가 봤다.
상가 1층에 있는 시장은 몹시 작았지만, 그럭저럭 시장의 구색은 갖추고 있었다. 가판에 늘어져 있는 야채, 생선, 옆의 분식점 등을 보니 잠시나마 압구정이 이렇게까지 부촌으로 떠오르기 전 예전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그 시절 압구정은 그래도 여전히 부자 동네로 불렸지만 그래도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그때도 ‘고급 아파트’로 인식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이 많이 사는 아파트 단지였고, 학교도 있고 시장도 있어 사람 냄새를 기던 곳이었다.
재건축 이슈는 모든 걸 바꿔놓았다. 현재의 ‘압구정’은 그 이름 그 자체만으로도 거리감을 불러일으키는 곳이 되었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재건축 1번지’로 주목받은 덕에 정부의 집중 규제 대상이 되었다. 그 때문에 여태껏 재건축 발목이 잡혀 이곳이 아직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외양만 보면 압구정은 ‘아날로그적 공간’이다. 낮은 상가 건물과, 상대적으로 높지 않은 아파트 덕에 그 사이로 넓은 하늘을 볼 수 있는, 서울 시내에서 보기 드문 곳이 바로 이곳 압구정이다. 그런 압구정의 아날로그적 단면은 온라인 쇼핑이 대세인데도 여전히 시장에서 장보기를 고집하는 내 모습과 은근히 닮은 구석이 있다. 언젠가 진짜 재건축이 되는 날이 오면 이런 압구정의 옛 모습도 같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의 장보기 습관도 바뀔까? 글쎄. 일단은 그전까지 압구정의 넓은 하늘이나 감상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