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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예지 Jul 22. 2019

결혼하고 수박을 먹지 않는 이유

저 보고 다들 수박 킬러라고 하는데요

더운 여름이 시작되면 무조건 엄마 손을 끌고 슈퍼를 갔다. 내 최애 과일을 먹을 수 있는 수박 시즌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르러 갔어도 어떤 게 맛있는 수박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퉁퉁’ 경쾌한 소리가 나면 맛있는 수박이라고 하는데 왜 매번 칠 때마다 다른 소리가 나는 걸까.


수박을 사랑하는 이유


다른 과일에 비해 수박이라면 유독 관대한 편이다. 맛없는 과일을 사면 금세 얼굴이 찌푸려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수박은 맛없더라도 그 누구의 탓도 하지 않는다. 덜 익은 수박이더라도 수박은 주스를 해 먹어도 되고 화채로도 그만이니까. 이 얼마나 활용도가 높은 과일인가.


창문을 열고 선풍기를 튼다. 그 앞에 비스듬히 누워 책을 핀다. 바로 옆으론 깍둑썰기로 모여있는 수박 통을 가지런히 놓는다. 한두 개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몇 번의 포크질이 끝으로 바닥 긁히는 소리가 난다. 그렇게 수박 한 통은 얼마 가지 못한다.


함께 모여 먹을 땐 이렇게 잘라먹는 편이지만.


내가 이렇게 수박을 즐기는 반면, 엄마는 슈퍼에서 수박을 사서 들고 갈 때부터 심상치 않은 표정이다. 그 무거운 수박을 배달시켜야 할지, 아니면 어떻게 들고 가야 할지, 그 정도야 내가 거뜬히 들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큰 딸이 좋아하는 과일인데 ‘이 정도 쯤야’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여름과 함께 수박이 왔다. 엄마 생신 날, 이모가 우리 집에 오시며 수박 한 통을 사 오셨다. 엄마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수박이 너무 커서 너네 냉장고에 다 들어가지 않을 거 같아.” 반으로 잘라 가져 간다는 엄마를 뜯어말렸다.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걸 가지고 가고 싶냐며 엄마를 나무랐다.


이제 수박이 싫어지려 해


수박을 자르기 위해선 의외로 큰 결심이 필요했다. 내 힘으론 도저히 자를 수 없었다. 몇 번 앞뒤로 칼을 왔다 갔다 하면 쩍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빨간 속살을 드러낸다. 또 반토막을 냈다. 뚝뚝 떨어지던 수박 물이 식탁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다. 끈적해진 발바닥에 힘을 바짝 주고 수박 껍질을 잘라냈다.


이제야 알 수 없던 엄마의 표정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딸이 좋아하는 과일이라 사 들고 가긴 했지만 그 이후의 과정을 떠올렸으리라. 딸이 먹기 쉽게 깍두기 모양으로 토막 내어 통 안에 넣어두는 일. 자를 때마다 당도 높아서 끈적대며 손에 달라붙고, 또 양이 많아 자르고 잘라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열심히 쟁여놓은 수박이 사흘 만에 사라졌다. 수박을 좋아합니다만 이제 수박 사기가 좀 귀찮아진다. 수박을 반토막 내고, 수박 껍질을 자르고 그리고 껍질을 버려야 하는 그 중노동을 하기 싫어졌다. 아니 그것보다 더 싫은 건 그 중노동을 나로 인해 수십 년 해왔을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에.


아기였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깍둑썰기로 수박을 먹었다.


과정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하지만, 내가 직접 해보지 않은 이상 고단한 과정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수박 자르기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결혼하고 처음 수박을 자르며 느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과일임에도 수박 자르기는 고된 노동이었다. 반대로 엄마는 수박을 잘라도 한 두 개 집어 먹을까 말까였다. 엄마는 그저 수박 좋아하는 딸을 위해 29년 싫은 소리 안 하고 깍둑썰기를 해왔다. 그저 딸이 맛있게 먹으며 행복해할 모습을 상상하며.


일주일 넘도록 썰리지 않은 수박


원래 지난주 일요일에 잠깐 엄마의 집에 들르려 했다. 약속이 있다는 이유로 가지 못해서 일주일 지난 다음 주말이 돼서야 다시 들렀다. 가족들과 함께 치킨을 먹고 집에 들어갈 때 동생은 오랜만에 만난 언니에게 서운함 토로하기 시작했다.


“언니, 엄마가 있지, 수박을

“응?


“엄마가 지난주에 수박을 샀는데 일주일째 수박을 썰지 않았어. 냉장고 옆에다 두고 언제 반 가르나 기다렸는데 손댈 기미가 안 보이드라?

“왜 그런 거야?


“언니 올 때 썬다고 안 썬 거지 뭐! 오늘 아침에 수박 깍둑썰기 하는 거 보고 언니 오는 줄 알았다니까!


우리 집에서 수박을 먹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뿐이라기보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탓에 한 두 개라도 먹고 싶어 했던 가족들은 좀처럼 맛보기도 어려웠다. 맛이 있든 없든 수박 킬러인 나는 수박만 보이면 사족을 못썼으니까.


결혼을 하고 과일을 챙겨 먹지 않는 딸을 위해 특히 수박을 좋아하는 딸을 생각하며 엄마는 그 큰 수박을 또 깍둑썰기를 해 두었던 것이다. 이번뿐만 아니라 새로운 멜론 수박 역시 엄마는 내가 오는 날 썰어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에 엄마를 나무라면서도 한 편으론 또 코 끝이 찡해져서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이제 먹지 않을 것 같았던 수박을 이번 여름에도 먹는다. 돌아보면 지금까지 그 큰 수박을 먹을 수 있었던 것도 엄마의 큰 사랑 덕분이었음을 이제야 못난 딸은 또 알게 됐다. 가져온 수박을 절반도 먹지 않고 냉장고에 넣어뒀다. 고이 모셔두고 아껴 먹고 싶은 수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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