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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예지 Sep 10. 2020

난 멘토일까 멘티일까

멘토도 멘티도 아닌 우리는 서로 배워나가고 있는데

직장인으로 일하면서 늘 한 가지 결핍이 있었다. 궁금증이 생겨도 바로 답변해줄 선생님이 없다는 점. 숫자로 판단하는 어른이 된 나에게 사회는 너그럽게 기다려주는 법이 없었다. 그 무엇도 용납되지 않던 그 시절. 병적으로 서점에 가서 책을 뒤적였다. 내 질문에 딱 맞는 해답을 해주는 책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봤다. 사람 만나기.


꽉꽉 채워 휴학을 한 탓에 6년동안 학교를 다니고 일을 병행하면서 대학 외 생활을 많이 했다. 특히 기자단 활동은 용돈 벌이로 꽤나 쏠쏠했다. 좋아하면서도 잘하는 글도 쓰는 데다가 돈도 벌수있다니. 심지어 마음속에 담아뒀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바로 들을 수 있는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 게 나에게는 큰 메리트였다.


아주 오래 전 인터뷰할 때 썼던 나의 사랑하는 노트들


나에게도 질문을 바로 답해 줄 선생님이 필요해


학생 신분일 때는 질문하면 모범생으로 인정받던 시절이 있었다. 무슨 질문을 해도 기특하다는 듯 엄지를 치켜 올려준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질문을 한다는 건 꽤나 어색한 일이다. 가끔 머리를 굴리며 분위기를 살피고, 셈법이 필요하기도 하다. 처음 만난 사람들 사이에서는 괜히 무시당할 수도 있으니까, 친한 친구들끼리는 쓸데없는 걸 질문한다며 나무랄까 봐. 어느 자리에 가서나 유독 왜라는 질문이 많았기 때문일까. 불의를 봤을 때도 의문을 가지며 참지 못하는 편이기도 하다. (이 부분 때문에 평상시에 동생이 많이 걱정하는 편이다.)


예전엔 잘 닦아놓은 선배들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가히 롤모델에 집착했던 것 같다. 커리어우먼, 워킹맘, 여성 CEO. 선망의 눈초리로 바라본 그들의 삶은 치열했고 강박적이었다. 하나에 몰두하는 모습이 좋아 보이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짠하기도 했다. 두 가지의 일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거나 다른 방식으로 삶에 몰두하는 여성들을 발견한 순간, 롤모델은 없다고 깨닫게 됐다.


인터뷰를 통해 다양한 삶의 레퍼런스를 이해했다. 여성일 수도 있고, 해외 남성 작가일 수도 있고, 차이에 상관없이 받아들이다 보니 복합적인 것들이 합쳐서 나의 롤(Role)을 만들었다. 같은 걸 따라 한다고 해도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린 모두 다른 개체다. 고유한 삶의 주체로 수많은 타자와 환경에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방법이 제각각이다. 결국 질문에 대한 답을 누군가에게 듣더라도 나에게 맞는 답해 줄 선생님은 바로 '나'일 뿐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


누군가의 멘토가 되는 건 무엇일까.


습관적인 인터뷰 덕분일까. 연속적으로 질문을 뽑아내는 게 크게 어렵지 않은 편이다. 질문에도 좋은 질문과 나쁜 질문이 있다. 상대방을 틀 안에 가둘 수 있는 건 굉장히 나쁘다. 단편적으로 바라보게 한다는 건 참 좋지 않은데.


올해 두 개의 사업(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 4.16재단)안에서 멘토링을 진행하고 있는 시점에서 스스로에게 자문한다. 과연 나는 열린 질문을 하는 사람일까. 열린 질문을 하기 위해 나는 무슨 의문을 가져야 할까. 멘토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된 단어다. 돕는 사람을 멘토(mentor)라고 일컫는다. 반대로 도움을 받는 사람을 멘티(mentee)라고 부른다. 이렇게 보면 멘토와 멘티는 매우 일방적인 관계 같다. 수직적이고 무언가를 주기만 하는 이가 멘토 같은 느낌.


일상 안에서 나는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해볼 수 있을까

내가 하고자 했던 프로젝트를 위해 개인에게 예산을 지원하고, 나의 프로젝트에 온전히 쏟아 결과물로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작업. 그 작업의 과정에서 나는 함께 걸어가는 한 사람이다. 글쓰기 수업을 도와드리는 분들까지 포함하면 거의 50명 작업물의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왜 나는 이 작업을 도와드리는 것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꽤 오래전부터 불편함이라는 키워드는 나의 것이었다. 주변의 모든 것들에 질문을 던지고 불편을 지나치지 못하던 나를 미워하다가 어느 날 알게 됐다. 그냥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이게 바로 고유한 나의 모습이라고. 깨닫게 된 순간 진정으로 다른 사람에게 나를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다. 진정성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매주 두 시간씩 몇 팀의 소모임을 운영하며 공통적으로 깨닫는다. 내가 가이드를 주는 건 매우 한정적이다. 각자의 일상에서 덕질을 한 사람은 본인의 경험을 온전히 내어준다. 이렇게 반대로 생각해보면 멘토가 멘티가 되는 경우는 부지기수. <멘토>라는 말은 너무 거창하지 않은가? 누구보다 한 발자국 더 앞서 나갔다고 해서 멘토라고 부르는 건 완벽한 오답임에 틀림없다. 특히 그중에서도 최악을 우리는 꼰대라고 부른다. 꼰대들의 답은 한 가지. 내가 한 대로 하면 쉽게 쉽게 할 수 있어. 가끔 내가 그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습관적으로 덧붙이는 말이 있다. (나름대로 경계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지점이다.)


"좋은 정보는 '나로부터' 나와요. 스스로 답을 찾지 않으면 스스로의 것이 아니에요."


일방통행이 아닌 서로 소통하는 우리가 될 수 있다고

영감을 받고 싶어서 정보를 덕질하는 즐겨찾기 수집광이다. 정리해놓은 자료를 그들에게 보낼 때의 희열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최애 덕질은 사람. 코로나 때문에 느낄 수 없는 것들의 소중함을 느끼면서 비대면으로 대체해보려고 노력하는 것들 몇 가지. 그들의 몸짓, 눈빛에서 나오는 따스한 기운. 밑그림도 희미했던 그들의 모습이 몇 번의 반복된 질문으로 명료해지고 다듬어지는 시간이 행복하다.


질문을 잘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러기 이전에 상대방의 의중을 이해하는 게 먼저다. 맥락을 이해하는 선행 작업은 그들의 보이지 않는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값진 기회를 부여한다. 진짜 목소리를 듣지 못한 채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질문하게 되면 오해의 씨앗은 커지고 잘못된 질문이 연달아 이어지게 되는 법이다.


아주 열심히 뛰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한 사람의 다독임이 무릎을 털고 일어나게 하는 큰 힘이 되는 때가 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우리는 매일 하루라는 여정을 살아간다. 그 여정을 살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동기부여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좋은 질문을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오늘은 나에게 어떤 질문을 던져볼까. "나는 무엇이 되어야할까."


다시 생각해보면 꼭 무엇이 될 필요는 없지.

그냥 지금 나 자신이면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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