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는 '게으름'을 찬양했을까
온전히 쉬는 날이 단 하루쯤은 있을까? 최근 생산성 높은 삶이 각광을 받으면서 4시간만 일하기, 3시간만 일하기 같은 인스타그램 게시물이 보인다.
게시물처럼 짧게 일하고 끝날까? 시간이 줄어든 만큼 또 다른 일을 찾는다. 사이드잡으로 제2의 월급을 벌고자 주말에도 일하는 게 당연지사. 업무환경이 개선된다고 해서 쉬는 게 쉽지 않다. 하루를 허투루 쓰는 사람은 죄책감을 느끼는 게 자연스러운 시대. 나도 그렇다. 그렇지만 사람인지라 가끔 늘어지고 싶을 때가 있다. 드라마 혹은 예능 몰아보기를 하고 나면 왠지 모를 죄책감이 나를 휘감는다. 결국 효율적인 삶을 살겠노라 다짐하고 ‘오늘 하루를 낭비했다.’고 나를 탓한다.
지난 몇 년, 워라밸이라는 키워드가 지배적인 사회였다.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업무 환경의 변화로 인해 ‘삶의 질’에 대한 양태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이유는 인공지능의 발달과 궤를 같이 한다. 급속한 기술 발전으로 개인 간 경쟁뿐 아니라, 기술과의 경쟁이 사람들에게 큰 위협이다. 평생직장이 사라진 시대, 경제적 불확실성은 불안감을 심화시킨다. 코로나 이후 AI의 갑작스러운 유행은 지속적인 성장은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다들 이렇게 살아. 다른 회사도 그래. 요즘 저녁 시간 전에 퇴근하는 사람이 학교 선생 말고 누가 있냐? 너도 취직하면 알 거야."는 <한국이 싫어서> 책에서 나온 말이다. 일상에서 친구들과 쓴웃음을 지으며 주고받았던 말이다. 그러다 책 속의 주인공처럼 "경쟁력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에 빠진다.
오래 근무하는 게 성실근면함을 증명했기에 '장시간 근로'에 매우 익숙하다. 특히 회사의 성장과 나의 성장이 하나라고 여겼다. 이와 반대로 2030 세대는 휴식에 대한 중요성을 설파한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대 간의 갈등은 여전하다. 사실 몇 해 전부터 정치권에서 주 4일제에 대한 논의를 지속했다. 이슬람 국가인 아랍에미리트는 주 4.5일 근무제를 도입하였고, 일본 집권당인 자민당인 주 4일제 추진을 공식화했다. 이처럼 '노동 시간 단축'은 세계적인 추세다.
근로 시간을 줄이면 생산성이 높아질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다양한 가설을 증명했다. 그중에서도 다니엘 쿡의 '생산성 법칙'을 확인해 보자. 게임 디자이너 다니엘 쿡(스프라이폭스)은 "오래 일하면 생산성도 높아질까?"라는 의문을 가졌다. 그는 주 60시간 VS 40시간 근무자를 비교하였다. 업무 초반에는 주 60시간 근로자 생산성인 높았지만, 하락 곡선이 역시 가팔랐다. 4주 차가 되어서는 주 40시간 일하는 근로자보다 생산성이 확연히 떨어졌다.
휴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휴식은 과소평가되고 있다. 실제로 휴식을 하게 되면 경쟁에서 뒤처질까 봐 두려운 마음이 매우 크다. 가장 크게 우리는 휴식의 기준이 '타인'에게 맞춰져 있다. 사람에 따라 선호하는 휴식의 형태가 다름에도 주말에는 무언갈 하면서 쉬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라이프스타일에 따라서 휴식의 유형이 모두 달라진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20대 초중반의 나는 극외향형의 사람이었다. 그 때문인지 친구들은 만나거나 에너지를 방출하는 게 나의 휴식이었다. 매해 락페스티벌을 1박 2일 혹은 2박 3일을 다녀와서 에너지를 방출해야만 하반기가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지난해 오랜만에 펜타포트를 다녀왔다. 웬걸.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치이고, 정신없었다. 좋아하는 노래만 듣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환경이었다. 결국 돗자리를 펴고 자리에 앉아 멍 때리며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5시간 정도를 놀고, 다음날까지 끙끙 앓고 나자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었다.
지금의 나에게 있어 휴식은 정적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거실에 앉아 눈을 감고 있거나, 명상 음악을 틀어놓고 <이적의 단어들>과 같은 책을 읽는 시간.
휴식을 잘할수록 행복감이 향상되어 다시 사회로 복귀하는 힘을 얻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실험사회심리학저널>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휴식을 '시간 낭비' 혹은 '비생산적인 시간'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휴식시간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심지어 여러 정서장애와 보다 깊은 연관성을 보였다는 연구 결과를 보여주었다.
생리학적으로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몸의 신호를 터부시 하고 피로를 쌓아가면 우리는 만성적인 스트레스를 받는다. 여기서 <자동조종>의 저자 과학자 앤드류 스마트는 이렇게 말한다. "집중력과 생산성을 무한대로 늘려갈 수 있다는 생각은 틀렸어요. 그런 생각은 우리를 자멸로 이끌 거예요."
생산성이 높은 삶을 갈망하고, 휴식을 취하고 싶어도 지금을 사는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신경 피로가 우리를 덮쳤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일에 대한 고민을 꿈속에서도 고이 안고 간다. 그렇게 지속적으로 불안을 가지고 살아간다. 피로감이 가득한 삶 덕분에 제대로 된 휴식은 꿈꿀 수도 없다.
버트런드 러셀은 과도한 노동과 경쟁이 사람들의 행복을 저해한다고 주장했다. 더 많은 휴식 시간을 통해 삶의 질을 향상할 수 있다고 본 그. 그의 책 중에 <게으름에 대한 찬양>의 이야기를 통해 휴식에 대한 생각을 다르게 해 보면 어떨까? * 다른 내용과 달리, 아래 내용은 거의 책의 본문을 따왔다. 버트런드 러셀의 멘트가 너무 주옥같았다.
실제로 이익을 가져오는 것만이 바람직한 행위라는 관념이 모든 것을 뒤바꿔 버렸다. 생산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생각하고, 소비에 대해서는 너무 적게 생각한다. 일할 땐 초조하고 여가를 즐길 땐 개운치가 않다. 이렇게 늘 공포에 시달리는 상태야말로 문명 세계의 넓은 지역을 휩쓸고 있는 광기 서린 분위기를 유발하는 주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우리는 즐거움의 향유나 소박한 행복에는 별 중요성을 두지 않는다. 나는 게으름을 찬양한다. 게으름을 찬양하는 나의 목적은 '즐겁고, 가치 있고, 재미있는' 활동들을 누구나 자유롭게 추구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데 있다.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생각, 과업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에 지나치게 빠져 버린 결과 일종의 긴장성 광신주의에 빠져버린다. 아이들에게만 놀이가 필요한 게 아니다. 어른에게도 현재의 즐거움 이외엔 아무 목적도 없는 행위에 빠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무용한 지식의 가장 중요한 이점은 아마도 숙고하는 습관을 조성해 준다는 점일 것이다. 필요한 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한 특정한 정보가 아니라 전체의 시각에서 본 인생의 목적에 관한 지식이다.
도시 사람들의 즐거움은 수동적이다. 넷플릭스 보기, 축구 시합 관전하기 같은 것들 말이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뭘까? 도시인의 에너지가 모조리 일에 흡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여가가 더 있다면, 그들은 과거 적극적인 부분을 담당하며 맛보았던 즐거움을 다시 누리게 될 것이다. 일하는 것을 강요받지 않는다면 '나의 지적 호기심'을 탐구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진정한 휴식을 깨달아갈 수 있을 것이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쓴 버트런드 러셀의 삶은 심상치 않다. 게으름이 중요하다고 설파했으면서 그는 평생 70권 이상의 책을 출간하고, 2천 편 이상의 글을 쓰는 초인적인 집필 활동을 했다. 이 책 외에도 <행복의 정복>, <철학의 문제>, <서양철학사> 등 그의 책을 보고 감명받은 게 참 많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했음에도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서향철학사는 우리 학교 전공 서적이었다.)
조실부모한 러셀은 고독감과 우울증에 시달렸지만, 지식에 대한 끝없는 탐구욕이 그를 계속 살게 만들었다. 철학자로만 알고 있었지만, 그는 유클리드기하학을 배우고 이후 학문영역에서 거둔 최고의 성과라는 평을 받는 <수학의 원리>라는 책을 썼다.
러셀 자서전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말한다. "단순하지만 누릴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 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마치 거센 바람과도 같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로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쓸데없는 지식으로 얻는 즐거움도 많습니다."라는 그의 말처럼 나를 위한 양질의 휴식과 쓸데없는 호기심이 나에게 좋은 작용을 할 수 있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시간. 집중력을 무한대로 늘릴 수 있다는 말을 뒤로하고 이제 죄책감을 버릴 때다.
� 참고자료
<게으름에 대한 찬양>, 버트런드 러셀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버트런드 러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