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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연 Sep 14. 2020

나는 여전히 돈도 없고 좆도 없지만

연남동에서 파나마로

취한 채리에게


'취한 채리'라고 쓰니까 내가 좋아하는 카페 이름이 생각이 난다. 상수동에 있는 반지하 + 1층 복층 구조로 된 카페인데 낮에는 제비다방이란 이름으로, 저녁이 되면 취한 제비란 이름으로 운영을 하는 곳이야. 낮에는 커피를 팔고 저녁이 되면 인디밴드의 라이브 연주를 들으며 와인을 마시는 곳이야. 와인을 마신다고 해서 고급스러운 느낌은 아니고 아주 캐주얼하고 자유분방한 '홍대스러운 곳'이지. 그곳엔 꽤나 추억이 쌓인 곳인데 한참 성공한 디자이너가 되고 싶던 20대 후반쯤에 자주 제비다방에서 술을 마셨어. 한편엔 핑크색 LED로 '돈도 없고 좆도 없지만'이란 문장이 빛을 내는데 그 한마디가 어쩐지 위로가 많이 되던 곳이야. 실제로 그때의 나는 돈도 없고 좆도 없었으니까. 뭐 지금도 마찬가지로 돈도 별로 없고 좆은 역시나 없긴 마찬가진데 그때보다 나는 훨씬 만족스럽게 나이가 들고 있는 것 같군.


지난 편지에서 너의 식탐 리스트를 보면서 그날 밤엔 뭘 먹을지 고민하다가 결국 떡볶이, 그리고 차돌 전골, 두부김치를 배달시켜서 먹었어. 아 참, 그리고 족발도 먹었어. 이 정도면 너의 일주일간 식탐을 나는 하루 만에 다 채워버린 게 되는 건가? 후훗!! 네가 편지에서 말했듯 나는 여전히 술을 마시거나 밥을 먹을 땐 한상 가득, 푸짐하게,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놓는 걸 좋아해. 그리고 정작 나는 많이 먹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많이 먹는 걸 보면서 흐뭇해하는 편이지. 하지만 술 마실 땐 안주'빨'을 세우는 편이니 우리 이다음 술 마실 땐 네 식탐에 누가 되지 않도록 더 많이 푸짐하게 차려먹도록 하자. 지난 토요일엔 집에서 홈파티를 했거든. 친구들에게 남자 친구를 처음 소개해주는 자리였는데 다들 얼큰하게 취해서 비틀대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다가 결국 경찰이 왔어...(ㅋㅋㅋㅋㅋㅋ) 그때부턴 목소리를 두 톤 정도 낮춘 뒤에 역시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지. 으하하. 취한 사람은 아무도 못 말려. 이웃님들에겐 죄송하기도 하지만 평소에도 시끌벅적한 집도 아니었는데 조금(?) 시끄럽다고 바로 경찰에 신고를 한 게 괜히 심술이 나더라. '역시 서울은, 그리고 서울 사람들은 깍쟁이인가 봐'라는 생각을 했지. 어서 조용한 시골로 가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크게 부르면서 뛰어다니고 싶어 진다. 히히. 다음 주엔 그래서 강원도 어디쯤에 가서 부동산을 돌아볼 생각이야. 내년에 지낼만한 농가주택이 있을까 하고 시장조사 겸 다녀와볼까 해. 우리가 좋아하는 나영석 피디의 예능들처럼 예쁜 시골집은 구하지 못하겠지만 시골에 로망이 있는 감성을 채워줄 만한 동네를 찾아봐야지. 다녀와서 소식 전할게.


 너의 지난주는 맛있는 음식과 술에 취해있던 한 주였네. 건강을 위해서 운동은 쉬지 않고 하면서 죄책감 없이 맛있는 탄수화물을 마음껏 섭취하자고! 서울이 거리두기 2단계로 하향돼서 오랜만에 요가를 다녀왔어. 주말 동안 먹은 술을 빼고 왔다네 ㅎㅎ 이번 주는 또 열심히 운동하고 일하고, 그리고 죄책 감 없이 술을 마셔야겠어 하핫.


서울은 그새 날씨가 많이 시원해졌어. 가을이 왔나 봐, 하늘도 파래지고 구름도 예쁜 날들이 이어지고 있어. 종종 뜬금없이 비가 오기도 하고, 낮엔 여전히 덥지만 계절이 바뀌는 걸 보니 언젠가 이 코로나도 언제 왔었냐는 듯 계절처럼 지나가 주겠지? 가을이 온 기념으로 '가을방학'의 음악을 들으며 답장을 쓰고 있으니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내가 좋아하는 우리집 테라스의 가을 풍경을 첨부할게. 그럼 채리도 오늘 날씨에 맞는 음악을 한 곡 선곡해서 이유식을 만들고 푸짐한 식사를 하면 어떨까 해.

오늘은 월요일이니까, 행복한 한주를 시작해보자! :)

그럼 이만!





ps. 안 바쁠 때 답장 좀

연남동에서 도연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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