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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채리 Sep 12. 2020

주간 식탐 보고서

파나마에서 채리가

도연에게.


다짜고짜 나는 오늘 편지에 행복에 대해서 쓸 거야. 나의 지난 한 주는 철저하게 행복했기 때문이지. 그리고 행복에 비례하게 살이 쪘어. 맞아, 그 행복들은 먹는 행복이었어. 내 행복들에 대해서 들을 준비되었니? 부디 네가 출출할 즈음 이 편지를 읽고 내가 먹은 것 중 하나를 먹는다면! 참 만족스러울 것 같다.


  월요일엔 윗집에서 술을 한 잔 하자고 연락이 온 거야. 윗집에 사는 부부가 오빠가 만든 닭볶음탕을 꽤 좋아해. 가끔 "형이 만든 닭볶음탕 먹고 싶어요~"라고 하곤 하거든. 월요일에도 윗집 부부가 안주로 닭볶음탕 먹으면 어떻겠냐고 하더라고. 며칠 전부터 몇 번 닭볶음탕을 언급하기도 했어. 근데 오빠는 그 말이 내심 듣기 좋았던 모양이야. 요리하길 좋아하는 오빠로서는 내가 만든 음식을 누군가 먹고 싶어서 찾는다는 게, 마치 내가 쓴 글을 읽고 싶어서 다음 글 언제 올라오냐고 보채는 독자가 있는 기분과 비슷할 거 같아. 어쨌든 그래서 오빠는 닭을 빨간 양념에 졸이기 시작했지. 오빠의 음식은 레시피를 알려줄 수도 없어. 왜냐면 오빠는 계량을 하지 않거든. 알지? 엄마한테 "엄마~ 배추김치 어떻게 만들어?" 그러면 엄마는 얼만큼 넣는지는 안 가르쳐주고 들어가는 재료만 얘기해주잖아. 심지어 재료도 한두 개는 꼭 빼먹어. "마늘 안 넣어도 돼?" 그러면 "아, 마늘도 넣어야지." 이런 식이라고. 오빠도 크게 다르지 않아. 그래서 윗집 부부는 집에서 그 맛을 재현할 수 없어 굳이 우리 집에 와서 오빠의 닭볶음탕을 먹곤 하지. 대신 윗집에서 골뱅이 소면을 만들어왔어. 중국 슈퍼에 가면 한국 식재료와 일본 식재료를 함께 팔거든. 거기에 골뱅이 통조림이 가끔 들어와. 물론 가격은 너무 비싸서 나는 골뱅이를 먹을 생각도 안 해서 파나마에서 처음 먹는 골뱅이였어. 오랜만에 골뱅이를 먹는데 무지하게 쫄깃쫄깃하고 비릿한 게 너무 맛있는 거야. 참나~ 내가 뭐 참소라도 전복도 아니고, 심지어 통골뱅이도 아니고! 이런 통조림 골뱅이에 이렇게 감격하다니?? 해산물 빈민국 파나마에선 그렇게 되더라고! 파나마는 태평양과 카리브해를 끼고 있는데, 바다 끼고 있으면 뭐하냐. 집에서 바다가 보이면 뭐하냐고. 마트에 가면 파는 물고기가 네 종류를 넘지를 않아. 해산물은 뭐.. 새우랑 홍합 조개 오징어 빼면 전멸이라고 보면 된다. 오빠가 한국만 나오면 그렇게 멍게랑 해삼을 찾아대던 이유를 알겠더라구!


화요일엔 그나마 전날 먹은 걸 후회하며 저녁을 거르고 으쌰 으쌰 운동을 열심히 했어. 다음날도 이런 날들이 이어질 거라 착각하면서.


다음 날인 수요일엔 오빠가 저녁이 6시가 되어서 피자가 먹고 싶다는 거야. "피자 안 먹은 지 진짜 오래됐다.. 먹고 싶다.." 이러는데 나는 왜 그 문장에서 오로지 한식만 밝혀대는 나의 식성에 죄책감을 느끼고야 만 건지..

"그래?.. 피자 먹을까 그럼..?"

해버렸지 뭐니? 아니 그럼 피자만 먹으면 되는데~ 오빠는 꼭 피자랑 치킨을 같이 먹는 스타일이야. 한국이었으면 딱! 피나치공(피자나라 치킨공주) 좋아했을 스타일이지. 그래서 우린 도미노에서 피자를 시키고 KFC에 치킨을 주문했어. 근데 피자랑 치킨 먹으면서 맥주 없이 그게 넘어가니? 맥주 없으면 또 목이 턱턱 막히잖니. 그래서 맥주를 여러 캔 비워냈어.  피자라는 게 말이야. 은근히 끝도 없이 들어가더라?! 내일 아침엔 몸무게를 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던 밤이었어.


목요일엔 6개월 만에 떡볶이를 먹었어. 내가 자꾸 책임을 오빠한테 전가하려는 의도가 있는 건 아닌데.. 이것도 오빠가 먹자고 한 거야. "도저히 못 참아!!"라면서 오빠가 떡볶이를 만들더라고? 떡볶이 한 번 먹으면 다음날 무조건 체중이 올라있길래 떡볶이를 금욕한 지 6개월이나 되었더라. 그동안 냉동실에 묵혀두었던 어묵에선 냉동실 성애를 씹어먹는 맛이 났어. 대신 며칠 전 사온 떡국떡과 라면사리를 풍족하게 먹으면서 아휴~ 이 맛있는 걸 어떻게 6개월이나 안 먹고살았나 싶더라구. 배 찢어지게 먹었는데 떡 몇 개와 국물이 남은 거야. 이걸 버릴 수 있어? 난 그렇게 잔인한 사람이 아니야.. 그날 저녁에 나는 그 국물에 밥을 볶아 달라고 오더를 넣었어.

"나...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데, 그 영화 보면서 맥주랑 떡볶이 볶음밥 먹을래."

오빠가 진심이냐고 물었어. 그래.. 내 눈빛에서 나의 진정성 못 느꼈냐구.. 당장 볶아....라고 말하는 대신 그렇게 하면 오늘 밤 행복할 것 같다고 대답했어. 내가 시호를 재우는 동안 오빠가 준비를 마쳤더라고. 지난 편지에서 얘기했지? '줄리 앤 줄리아'라는 영화를 볼 거라고. 영화와 볶음밥과 맥주의 조합은 팝콘 같은 건 비교도 안 되더라!!!!


금요일에는.. 가만있어 보자.. 뭘 먹었더라.. 아! 금요일엔 내가 지난 치팅데이를 반성하며 저녁을 안 먹으려고 했거든? 근데 시누이가 족발을 삶았다면서 우리 집에 족발을 보낸 거야!!! 받자마자 난 알 수 있었어. 나에겐  이걸 거부할만한 배포가 없다는 걸.. 나는 족발이나 보쌈을 먹으면서 무김치 없이 먹는 건 받아들일 수 없는 타입이야. 그리고 무김치의 맛에 따라 이 족발집이 맛집이냐 아니냐의 기준을 세우기도 하지. 그래서 나는 신속하게 무김치를 만들었어. 내가 한 달에 한두 번씩 배추김치와 깍두기, 물김치를 담가댔더니 찹쌀풀 필요 없는 무김치는 거의 인스턴트 수준이랄까. 뭐 약간의 허세를 보태자면 그렇더라고. 어쨌든 나는 그날  내가 족발을 피할 길이 없음을 스스로 인정하며 무를 채 썰었어. 나랑 오빠는 족발에서 살코기 부분보다는 쫄깃쫄깃한 껍데기 부분을 좋아해. 넌 어느 부위를 좋아하니? 족발도 갓 삶자마자 썰어 야들야들~ 흐물흐물~한 걸 좋아하지. 그런데 시누이네 집은 오래 삶지 않아. 그리고 냉장고에서 한 김 식혀서 식감이 얼마쯤 단단하고 쫄깃한 편의점 스타일의 족발을 좋아해. 오랜만에 그런 종류의 족발을 먹었는데, 이건 이거대로 맛이 좋더라구? 와인을 한 병 땄어. 와인이랑 족발은 또 얼마나 잘 어울린다구. 어쩐지 이 조합은 살도 안 찔 거 같지 않니? 족발과 와인은 다이어트식이라고 분류했어. 그냥 내 마음대로 그랬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제 마지막 토요일이야. 지난 나의 치팅 주간의 화룡점정이라고 할 수 있지. 내가 우리 집에 미니 화로를 구비했다고 말했던가? 2인용 미니 화로를 이용해서 테라스에서 숯불구이를 종종 즐기곤 해. 토요일엔 무려.. 숯불에 양념 돼지갈비를 구웠는데 말이야!!! 이게이게.. 세상 존맛 핵존맛 우주대존맛이라.. 네가 아무리 마포구 구민이지만은 마포갈비를 뛰어넘는 갈비의 맛인 거야!!! 숯불향을 잔뜩 품은 짭조름하면서 달짝지근~한 돼지갈비는 말이야... 내 칠순잔치 때 다시 먹고 싶은 맛이었어. 구색 맞추기 좋아하는 나는 계란찜도 했고 된장찌개도 보글보글 끓였어. 파절이는 고정값이지! 소주는 두말하면 입 아프다! (처음 몇 잔은 소맥을 선호하지) 양파절임도 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거기까진 나의 능력이 되지 않아서 포기했단다. 친구야.. 아무리 백세시대라지만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세상이니까.. 혹시 우리 둘 다 칠십까지 살아있다면, 여전히 우리가 친구라면.. 돼지갈비 먹으러 내 칠순잔치에 참석하려무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시호한테 후식 냉면도 맛있게 준비하라고 할게..



이렇게 행복한 한 주를 보내고 일요일에 몸무게를 쟀더니 2kg이 쪘더라. 우와.. ^^^^^^^^^^^

빼는 건 힘들어도 찌는 건 졸라 쉽다.... 를 다시금 몸소 느끼며.. 이번 주엔 열심히 운동을 했어. 근데도 아직... 다 안 빠졌다...


와인을 마시면서 답장을 썼더니 뒤로 갈수록 술주정이 섞이는 것 같은 기분이야. 내가 지금 와인을 몇 잔 마셔서 그런 건 아닌데.. 문득 고백을 해보자면 나는 네가 말랐지만 깨작거리지 않아서 좋더라. 푸짐하게 한 상 차려놓고 먹는 걸 좋아하는 점이! 그리고 본인은 정작 얼마 못 먹는 점이.. 내 식탐을 꽤 충족해주더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참.. 여러모로 마음에 드는 친구란 말일세. 껄껄껄


그럼 이만, 나는 자러 간다!


p.s. 시간 날 때 답장 좀!

파나마에서 채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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