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ain " - Finneas
스타벅스 창 안에 전시되어 있는 "오늘의 그림"처럼
아무 표정 없이 노트북을 하고 있으면
노트북 너머로
창 안으로 보이는 형상을 흘끗거리는 사람
이미 보지 못한 사람,
그냥 어쩌다 눈 마주치는 사람,
마주쳤는데 모임 같은 데서 만났으면
시원찮은 인사라도 주고받았을만한 사람들 등의
캐릭터가 영화처럼 스쳐간다.
익숙한 얼굴을 시작으로 외국인들, 처음 접하는 실루엣, 손을 굳이 잡고 걸어야 하는 사람 둘,
따로 걷지만 그들만의 세상에서 하늘을 날고 있는 사람들,
어쩌다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의 시간이 넉넉한 사람들,
혹은 타인의 시선이 결핍된 사람들.
내가 박지후의 에디션으로 만들어 낸 작품같이
눈 앞을 각자의 의도에 의해 스쳐간 수백 명의 사람들도
그들의 작품 안에
스타벅스에서 토요일 하루를 온종일 앉아 그들을 지켜볼 만큼
주말이 한가한 어떤 여성을 엑스트라를 시작으로
지금 쯤 다른 영화 속에서
자신의 착각이 만든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있겠지.
어떤 감정도 특별히 무겁게 중력 하지 않는다.
너를 생각하기에 너와 나의 거리는 1년이라는 시간을 한 참 초과하고,
네가 아닌 사람들을 생각하기에 너는 그래도 너무 내가 사랑해버린 존재이다.
방금 마주친 눈 안의 사람이 되기에
내 시간은 이미 100 년 후를 배회하는 것 같고,
그 근거 없는 정의로 또 다른 일련의 사랑하는 연인들이 겪어내야 하는 과정을 시작하기에는
오늘 내 "영화에 출연한 연인들의 모습"으로 충분한 것 같다.
그들이 나와 너였으면 더 좋겠지만.
이를 이해하기 때문에
덜 슬프지만
흐르는 눈물은
역시 나의 철저한 감정의 고립이
얼마나 혼자 감당이 버거운 것인지를
나에게 보란 듯이 보여준다.
런던의 한 에디터이자 작가이기도 한
는 최근 "외로움이 사람을 죽게 할 수 있는가"라는 글에서 아래의 말을 한다.
" there are those who desperately crave connection yet just as desperately want to be left alone. This is, in fact, one of the particularly cruel twists of depression: The more you need others to help you out of your hole, the more you withdraw into it, burying yourself deeper and deeper still."
타인들의 관심과 타인과의 사회화가 절실하게 필요한 만큼 고립 또한 절실한 그 우울함의 잔인한 양면성.
타인의 관심과 도움이 절실할수록 이를 밀어내고 자신을 더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는.
이 내면에는 진정 원하는 사람이 따로 있지만 그와의 지속되지 않는 사랑에 의해 마음을 닫았기 때문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를 헤어 나오게 해 줄 더 나은 사람을 만난 경험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혹은 슬픔에서 빠져나올 절호의 시기를 놓친 것인지도 모른다.
지극히 나를 위로하기 위해 읽은 글이고 내 감정을 중력 하게 하기 위해 공유하는 인용문이기에
이 해석의 시작도 끝도 나의 감정에 기준하는 것 같다.
Finne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