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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tic Eagle Aug 03. 2019

4월 3일이 아파서요

: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작년 여름, 런던에서 19 개월의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뵙고 인사도 드릴 겸 할아버지 댁인 제주도로 가족 여행을 갔다. 오랜만에 가족 네 명이 한 비행기를 탔기에 감회가 새로웠다. 일주일 좀 안 되게 제주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하루를 할아버지와 여행을 한 것은 나와 가족들에게 꽤 특별했다. 이전에 할아버지와 함께 제주도를 여행할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날은 할아버지와 함께 박물관도 가고, 물회도 먹고 해수욕장도 가는 짧지만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그리고 그 날 금능 해수욕장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지 않을 수 없었다. 온 바다를 마치 할아버지께서 다 안고 계신 것 같았다. 그 때문에 할아버지의 등 뒤로는 바다는 보이지 않고 할아버지의 뒷모습만 경건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무엇을 보고 계셨을까. 혹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마음의 세월을 담은 그 뒷모습은 손녀에게는 결코 하시지 않을 말들로 가득해 보였다. 나는 멀찍이서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방식으로 할아버지와 "말이 없는" 대화를 나눴다.


할아버지의 뒷모습


내 인생이 나만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때조차 나만의 것이었던 적이 없었다.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고 기르셨기에 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부모님의 부모님이 계셨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나의 물리적 존재는 늘 선조들의 존재와 함께 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내가 나의 할아버지와 나의 현재 물리적 좌표를 나란히 한다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혹은, 그런 의미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여행이기도 하였다. 그날따라 할아버지와 함께 관광지를 방문하고, 외식도 하고, 바다도 함께 간 것은 영원히 내 기억 속 앨범에 저장될 것이다. 이 사진과 함께..



이따금씩 내가 평화롭다고 여기고 있는 어떤 순간의 저 편에서 누군가는 굶주림에 허덕이고, 아직도 꺼지지 않은 전쟁의 불씨의 희생양이 되어서는 그 시공간을 “현재"라 여기고 지낼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물리적 시간을 사는 동시대 사람들도 나라가 위치한 정치적, 물리적 “좌표"에서 현재를 그 고유의 방식으로 견디고 있는 이때,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고민의 중요성은 어디에 근거해야 하는 것일까. 대학원을 더 다니느니, 학위를 포기하느니, 결혼을 하느니, 하지 않느니, 등의 고민은 어디까지 소용 있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을 겨울 목도리처럼 떠가다 보면, 내가 여기에 있음과 동시에 기아와 전쟁으로 24시간이 채워지는 그곳에 있을 수 없다는 또 다른 차가운 사실로 인해 나는 그리하여 나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는 것이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온전히 소용하는 길이라는 생각에 도달한다. 내가 이 곳이 아닌 그곳에 있었으면 그곳에서 최선을 다 해 살아내려 하고 있었을 테니까. 무엇보다 이 곳엔 나의 생명의 뿌리, 가지 그리고 잎들이 아직 만개해 있었다.

조금만 거리를 두고 생각을 해보면, 나의 이전 세대들이 치러야 했던 지구 내에서의 권력과 통제를 두고 일어난 전쟁이 몇 세대만 늦게 일어났으면 그를 현재 우리 세대가 겪었어야 했을 일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세대가 그 전쟁을 치러야 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흘릴 피와 총성의 무자비한 멜로디는 내가 틈날 때마다 찾아 듣는 음악을 대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이전의 세대들은 그 피를 흘렸고, 총성으로 인해 귀를 막았고, 가족을 상실한 슬픔을 울부짖다 삼켜내야 했고, 총알이 비껴간 심장이 그래도 뛰어야 함을 자책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야” 했고, 지금의 우리가 비로소 “있는” 것이다.  


현재 나의 1분 1초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 어제 피 흘린 인류의 몫이고, 어제 밟힌 심장의 맥박이고, 어제의 총성이 앗아간 고막이며, 어제 걷지 못한 걸음이며, 어제는 볼 수 없던 푸른 하늘이며, 나의 배부름은 어제가 채우지 못한 굶주림인 것이다. 내가 자주 함부로 대하는 나의 시간들이 어찌 단 한순간도 장난일 수 있었을까. 내가 막다른 길에서 늘 읊조리는 “죽고 싶다"라는 말이 감히 나 스스로가 할 자격이 있는 걸까. 나는 어제 살지 못한 인류의 눈과 코와 입과 살갗일 텐데 말이다. 나는 어제의 “내"가 살지 못한 삶을 이어나가는 씨앗일 텐데 말이다.



그러나 어제가 우리에게 다른 방식으로 남긴 “겁"과 “조바심” 은 우리의 눈과 귀를 섣불리 닫게 하기 충분했다. 자기의 주머니 하나 채우고 살기도 버겁게 만든 것도 또 다른 어제가 남긴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은 당장의 막다른 길이 우리를 1차적으로 숨게 하고 비겁하게 할 지라도 다시 한번 숙고하여 이 모든 상황을 존재하게 했던 선조들의 불가피하게 희생된 삶을 잇고 있다는 고귀한 임무를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솔직하게 이토록 불안한 현재에서 나의 나약함과 나의 불안정함에 맞닥뜨리면 도망치고 싶고, 모든 것을 포기해서라도 빨리 지금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숱하게 했다. 이미 이러한 것이 대부분 현대 사람들의 통과의례처럼 공감할 사람이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겠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쉽게 포기할 목숨도, 쉽게 포기할 시간도, 쉽게 포기할 지금도 아닌 것이었다.   

할아버지와 소중한 시간을 보낸 다음 날, 부모님과 나는 이제는 제주 여행의 필수 방문지가 된 제주 4.3 평화 공원을 찾았다. 그곳에서는 제주도의 가슴 아픈 어제의 한 자락을 보고, 느끼고, 눈물 흘릴 수 있는 곳이다. 그 공원은 광활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넓으며, 그 넓은 공원 한쪽에는 그 사건 때 돌아가신 분들의 성함이 마을 별로 빼곡히 적혀 있다. 그중에는 그 당시 17세였던 할아버지의 눈 앞에서 이 세상을 떠나셔야 했던 할아버지의 아버지와 형님의 성함이 새겨져 있다.  

내가 적은 방명록이 아직도 붙어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 날 난 매우 아픈 가슴으로 방명록을 썼던 기억이 난다. 처음으로 안 사실과, 우리의 멋진 친할아버지이기만 하셨던 분의 10대에 겪은 전쟁과 상실의 아픔, 글로 표현하기 부족할 정도로 잔인하고 고통스러웠던 생존 이야기. 그리고 평화 공원 전시관에서 마주해야 하는 참혹한 역사의 재연은 나로 하여금 후손으로서의 삶에 대한 최소한의 태도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이제 와서 흘리는 눈물이 갈 곳이 없습니다... 그 일들을 피할 수 없었다면 지금의 이 존재를 헛되게 유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루를 누군가가 누리지 못한 일생처럼 살면 될까요. 할아버지께서 그때 생존해주신 사실로 인해 이 펜을 쥐고 있는 “저의 숨 쉬고 있음"이 아주 낯설고, 꽤 아픈 하루입니다. 제대로 이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할아버지 손녀, 다녀감수다.."




p.s. 4월 3일은 공교롭게도 내 동생의

생일이기도 하기에 계속해서 아플 수도 없는 하루이다.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늘 감사합니다.


2018,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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