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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tic Eagle Aug 18. 2020

내 말을 안 들어도 좋으니까
잠시만 앞에 있어주겠어?

보고 있어도 기억에나 남는 존재가

타인이었다. 

혼자 돌아서서 마주한 공간은 늘

타인에 대한 "기억"의 향연이 펼쳐짐에도

막상 마주하고 있던 "타인"은 

가끔은 시끄럽고, 

자주 고집스럽고,

대부분 말이 안 통하고,

자기 이야기할 때만 즐거워 보이고,

나를 보는 건지, 폰을 보려고 나온 건지

의심스러울 때가 더 많았다. 



마주하는 시각의 상대와

굳이 기억에나 남은 상대는

철저히 다른 차원에서

나를 갖고 논다. 



결국 타인을 보는 행위를 통해

타인을 안다고 여기는 정도는

그 주체가 자신을 이해하는 정도에

자연스럽게 한정되는 방식으로

대화를 통해 일말의 알아가는 단계를 만들어 보지만


심지어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데도 불구하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데도 불구하고

썩 같은 공간에 있는 것 같이 않을 때가

종종 있었다. 


아니, 아주 자주 있었다. 


또한 만날 때마다 같은 이야기를 해도

결코 질리지 않는 "우리네들의 사이"를 보며

실제로 서로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방식으로

그 시공간의 "같이 있음"을 즐기려고 만나는지도 몰랐다. 



대화가 필요해서 만나서

한참 대화를 하더라도

막상 다음 순간이 되면

잊고 아주 빠르게 다른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는

탄성력을 보면,

방금 나는 아주 합법적인 독백을 한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렇듯 내 인생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이 결코 있을 수 없는 사람을 앉혀놓고

내 이야기를 시작해도 끝을 낼 수 없고,

끝을 내도 시작을 기억하게 할 수 없는 

그 Truth 앞에서 앉아 주저앉아 우는데도


저 앞사람들은

할 말을 찾지도 못했고,

내 이야기를 듣겠다는 다짐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애꿎은 커피나 홀짝거리다

폰을 보는 것으로 

나에게 울음을 그칠 공간을 준다. 



이런 상황에 있는 나의 문제였다. 

이런 상황을 만든 나의 "사정"이었다. 

내가 아직도 존재하는 목적은

이 "인간"이 덜 힘들게 살게 하는 데 있는 것이다.

"내"가 아니면 이 상황을 구제해줄

어떠한 "사람"도 없었다. 



내가 태어난 이유는 

"내"를 살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태어나게 해 준 사람들이

해결해 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가장 힘든 건.


시간이 갈수록 

기억이 사라져. 



인생에 아주 중요한 "사람"이었던 

그 꽉 찬 기억에 안개가 끼기 시작하는데,

그래서 괜찮아지는 게 아니라

내 인생 전체에 구멍이 뚫리는 것 같은 거야. 


내 웃던 얼굴도 기억이 안 나고,

내 목소리도 기억이 안 나고,

너도 기억이 안 나는 거야. 



그렇게 산다는 건. 



"척"을 해야 불특정 타인을 대할 수 있다는 

것인데, 



더 늦기 전에 


너도 날 더 잊기 전에


가고 싶은데.



그런데 넌 괜찮은가 봐.



결국 누군가를 기억하는 것도

내가 만들어 낸 "상상"에 국한하여

존재하는 것이겠지. 



내가 그리운 건 네가 아니라

너에 대한 "상상"이 만들어 낸 

동화였나 봐. 



그러나 상상하는 것을 멈출 생각도

없고,

너를 그리워하지 않지도 않을 거니까,

결국 내가 사는 방법은

내가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나를 살리는 방식으로 

괴롭히고는 했다. 



행복이 나의 몫인 만큼

슬픔도 나의 몫이라는 것을. 




뭘 해줘야 얘가 울음을 그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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