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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tic Eagle Sep 16. 2020

당신의 현실을 좀 빌려주겠어?

힘들다고 붙잡는 엄마가

점점 낯선 사람이 되어가고


수화기 너머로 아직도 통화해주는 당신은

이제 나의 가장 먼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자

잊어야 하는 사람이다.


내가 정당화할 수 있는 현실이

이 세상에 없다고

스스로 생각할 때만큼은

보이는 세상이 없다.


적당히 하라는 타인의 말조차 들리지 않을 때에도

타인의 명의로 된 카드로 밥을 사 먹고

커피를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역겹게 만드는 방식으로

나는 진짜 모르겠다.



한 사람에게

이렇게 내 전부의 현실을

내어줄 거였으면

그 현실을 떠나 사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어야 했다.


난 이제 살아있다는 것의

희미해지는 의미의 거짓말의

속삭이는 진실에 귓등이 따갑다.


취기가 주는 진부한 알딸딸함이

속삭이는 거짓 희망 고문에

진저리가 나서 술을 끊었지만

24 시간 동안 내가 머물 수 있는

현실이 거의 없을 때

내가 잡혀있는 유효한 현실은

주민등록증이 말소되지 않은

88년 생의 적당히 산화된

피부일 뿐인 것 같았다.



힘들다는 말을 자꾸 하는 이유는

정말 듣고 싶은 말이 따로 있어서이고

누군가에게 그 말을 강요해야 한다면

그 말을 듣는 것의 의미를 의심해 볼만 하고,

그 말을 듣지 않아도 되어야 한다면

왜 자꾸 힘들다는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아야 했다.



정녕 언어의 습관일 뿐인 것일까.



병원에서 몸에 난 어떤 것 때문에

조직검사를 하겠다고 해서

내 이름을 써서 그 피가 나는 사건에

동의를 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병원을 뛰쳐나왔다.



살아야 해서 찾은 병원에서

나를 살리겠다고 해서

나는 내가 살고 싶어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한 바람에

병원을 나온다.



누구를 사랑했던 기억이

한 생명을

이토록 시들게 하더라도

멈출 수 없으면

이 사랑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현실이 보이지 않는 것인지

내가 보려 하지 않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



도움이 필요한 만큼

도움의 의미를 느낄 수 없다.



적당히 몰래

타인의 현실에 기생해보려 해도

이미 그들에게 투명인간이어야 하는 내가

서 있어야 하는 사회적 거리가

꽤 섭섭한 방식으로

귓가에서 신나게 울려대는 노래를

같이 들을 당신이 없다.



인간에게 인간이 어느 선 이상까지

필요로 하는 것일까.

타인을 사랑한 순간

나를 묻어버리는 내 습관이

타인에게 너무 필요 이상의 특권을

주었음과 동시에 그만큼 멀어지려 하는

물리적 공식에 따라

나는 이제 내 사랑을 정의하기에는

내가 너무 웃겨졌다는 걸

깨달아버린다.



호주, 미국, 영국, 덴마크, 한국

그렇게 나를 타국에 놓아두면서

나를 시험할 수 있었던

용기는 막상 연기가 되어

서른 하나,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연락망과

혼자여야 하는 그 삭막한

보이지도 않는 미래를 어제의

사전을 안고 살아가는 방식으로



그 어제에 존재했던 어느 누구도

나를 안 적이 없는 방식으로

그렇게 떠나 있었던 바람에

엄마 아빠가 알던 착하고 순진했던

아기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 사고의 패턴이 깨지지 않는 이상

나는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 사고의 패턴이 깨지면 당신의

여인도 사라질까 두렵지만.



당신이 사랑한 내가

내가 생각하는 그 이미지일 가능성은

당신이 아직도 나를 좋아할 가능성만큼

희박했다.



삶은 따지기에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고,

기억하기에는

너무 왜곡하기 쉬웠다.



그래서

통화 가능한 번호를 하나쯤 가지고

가능할 때 연락하여

일반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덜 외로울 수 있는 방식으로

지독하게 고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했다.




당신의 현실 좀 빌려줄래요?

제가 조금  

불안정해서요.

금방 떠날게요.

당신이 인지한 적도 없다고 여길 정도로

짧게 있다가.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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