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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tic Eagle Oct 09. 2020

현실이란 단어의 그 잔인 모호함

Reality needs to go

내가 뭘.

원할 수 있는데요?


내가 뭘.

할 수 있는데요.


여러 가지의 "현실"일 수 있었던

장면들의 겹겹은 나의 현재. 만큼은

현실로 인정하기 싫게 만드는 방식으로

나는 어디에도 없는

그러나 기억의 모든 언저리에 존재하는

비겁한
남자가 아닌 두 개의 성별 중 하나였다.



뭐가 난데요.


바리스타? 제빵? 웨이트리스?

요리사?


일상생활에서 접근 가능한

직업군들이 나의 일말의 가능성의

pool안에 들어오지만

정작 내가 소화해낼 수 있는

모습, 혹은 내가 존재하고 싶은 의도가

있는 "현실"은 "그 사람"이 있는 곳과 시간이었다.



내가 "뭐"라서 좋아한 게 아니라

나라는 사람을 사랑했다고 확신하게 한

그 사람의 울타리가 아닌 곳은

이불 밖은 위험하듯,

나에게 적나라하게 낯선 곳일 뿐이다.



어쩌면 현재를 인지하지 않고 보내려는

버르장머리가 모든 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남기는 방식으로

그 구인공고를 클릭할 수 있는

기한은 지났을 뿐이었다.



글이 얼마나 장황할 수 있는 것과

무관하게 자아내야 하는 그 잘난 현실은

나를 잠도 못 쉬고, 숨도 못 들게 한다.



어디서부터 나를 잃었을까.


내가 누구였을까.


적잖이 한심하게 쳐다보는 엄마의

나를 향한 눈빛이 현실인 방식으로

내가 그리하여 그를 외면하고

눈을 감아 데려가는 곳은

그 사람이 나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시공간이다.



실연에 좀 무너지면 어떤데요.


1-2 년 좀 아프면 어떠냐고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시련을 견디는 공식은.

태어난 시각과 시점과 위도와 경도가 다르듯.



그러나 그 무너진 시간과 공간에서는

의사도 없고 약도 없었다.


그냥 시들다, 링거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아무리 세상에 반항을 해도

더 들 수 없는 잠과

더 기억해낼 수 없는 그 어떤 시점은

나를 제대로 허탈하게 한다.


나쁜 건 기억이 안 나고

좋았던 것만 기억으로 무장해서

나를 현실에서는 무뎌지게 하고,

타인에게 증명할 수 없는

내가 사는 세상은

엘리스의 원더랜드보다

삭막해져 갔다.



이제 아무 현실도 내 현실로 인지하기 싫다.


너를 잃고도 살아야 한다면

너를 잃었는데도 나보고 웃어라 한다면



나는 그러나 이렇게 모든 글을 써 버릇하는

습관부터 버려야

숨을 좀 쉬며 살 듯 보였다.



그러나 글도 안 멈춰지고

네가 그리운 것도 안 멈춰지고

불면증도 안 멈춰지고

나를 보장하려는 자격증들도

무거운 방식으로

그는 내가 무거워졌는지

나에게서 최대한 멀어지려 한다.



당신이라는 환영의

물고기가 내 마음속 어항에 있는데,

그는 나에게만 보였다.


그 물고기라는 아이디어 속에는

당신의 주체적인 나에 대한 인지만큼은

없는 방식으로



그 홀로그램을 계속 살려두는 건

나의 하릴없이 그리워하는 습관이었다.



네가 싫어.

라고 한 마디만 해주면 좋을 텐데,

그런 말은 하지 않고,

점점 연락에서 멀어져 가는

당신을 붙잡을 단어도

너무 자주 써서 사라지고 있을 때,



비로소 내 기억이 너를 놓고,

네 폰에서 내 연락의 알람이

사라진 우리가 행복해야 한다면,

나 억울해서

왜 살지.

앞으로.




앞의 글을 다 지우고도 다시 쓸 수 있는

내가 놀라운 방식으로



현실은 꽤

촉각이 닿아서 잡을 수 있고,

시각이 인지해서 사회적 거리를 가늠할 수 있고,

청각이 날 웃기게 하는 농담이 들리고,

후각이 있기에 항복당하는 빵 냄새에 지갑을 열고,

미각이 있기에 어떻게든 누군가의 손을 거쳐 나타난

음식을 먹는 그 아주 1차원적인

역할놀이에 수렴하는



그리하여 어느 차원의 역학을

빌려서 금요일 오전 11,56분을

내 현재로 인지하든,



이 시각 나의 편한 장과,

편한 숨과 잘든 잠으로

멀뚱멀뚱하게 보낼 수 있는

보채지 않는 나의

일말의 "안녕"으로부터

시작되는 철저하게 현실이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다는 전제로부터

나오는

배부른 시나리오인지도 몰랐다.



혹은 배고픈 시나리오거나.



아파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있었다.

기억 해내 와서

우는 그 고통이 잠시 떠난 시각에는

웃을 만도 했다



인생.



살아보다가

정말 정말 날씨 좋은 날

정말 여유가 넘치는 어느 오후

커피를 한편에 두고

전화를 걸어볼까.라는 고민만

100번 한 후 잘 지내냐는 문자를 보냈을 때,

전화가 와서 나도 잘 지낸다는 목소리를

나에게 들려줄

사람이 있다는 것. 있을 것이라는 희망.



혹은, 그 커피 잔의 상대편에서

나를 의뭉스럽게 쳐다보는 사람 한 명.



없더라도,



그 평안할 수 있는 시각 언저리에

진짜 좋아하는 사람.

이랑 있으면서 이게 꿈인가. 싶은 생각을

골똘히 하다가

밥이나 먹으러 갈 수 있는.



뭐 그런 것들.



뭐 그런 것들...



뭐 그랬던 것들.



그냥.



네가 없어서

나의 상상력의 한계가 없다는 것만

알 것 같은.



토요일 같은 금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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