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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tic Eagle Nov 22. 2020

아메리카노와 라테의 차이는

물이냐 우유냐. 그게 그렇게 단순한 게, 인생이었다.

아직도 내가 너 사랑해도

되냐고 묻고 싶은데,

그 말이랑 개념이 웃겨서

글을 지웠다.



"아직"이라는 말을 쓰기에는

"지금" 내 감정인데 무슨

"아직"을 붙여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고,



사랑해도 되냐고 묻기 전부터

사랑했고, 그 아이가 싫다고 했어도

사랑은 유효하다는 것을

내 청춘을 걸고 한 시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누구가 부정한들,

내가 아는 사실을 적어도

나의 얇은 귀로 인해

번복하고 싶지 않음이

내 2021년 목표라면 목표이다.



사랑은 있고,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며

사랑을 왈가왈부한다.



자기들의 의지가

자연현상을 이길 수 있는 것처럼

착각에 빠져서는



장거리 연애를

"혼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 아이의 마인드를 어디부터

수리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데리고 사는 중이다.



갑갑하게 구름으로 물든

하늘이 반가운 일요일이다.

덕분에 내 감정이 덜 갑갑하다.

왜냐하면 갑갑한 캐릭터를

날씨에게 빼앗겼으니,

우울한 연기를 하기보다는

오늘은 좀 희망찬 글귀들이 나를

맴돈다.



비단, 나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닐 것이다.



그가 하루 내내 연락을 씹었다.

처음 그 잠수를 탔을 때에는

나는 말 그대로 미칠 뻔했다.

어쩌면 헤어지고도 매일 연락하려고

하는 내 의도가 더 미쳤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다 그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그가

답을 했을 때, 단지

어떻게든 답이 온다는

전제 하에 나는 지금

꽤 미침으로부터 나를 보호할 수

있는 평정심을 유지 중이다.



처음 내가 하루 연락을 하지

않은 다음 날 그는

매우 성의 있는 대답으로

나를 꽤 행복하게 했다.



그 날만 나는 행복했다.



에스프레소를 내려

물을 타서 칭하는 단어와

우유를 타서 칭하는 단어가

다르다.



존재를 방금 내린 에스프레소라고

하면, 내가 물을 선택했으면

일단은 아메리카노로 살아야 하고

우유를 선택했으면 라테로 일단

살아야 했다.



그런데 물을 넣어놓고

우유를 넣을 걸... 이러고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은 단 한순간의 시행착오로

죽는 개체가 아니고, 생각할 수 있는

의식의 개체이고, 그 생각의 거듭에서

어떤 규칙을 찾아낼 수 있는

꽤 뻔한 사회에 살고 있기에,

오늘 아메리카노를 마시면

내일 라테를 마실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방식으로 그에서 오는 선택의

딜레마에 빠지기도 한다.



내일도 살 거면서 꼭

이 순간에 뭔가를

다 해내야 할 것 같은.



그래서 아침에는 아메리카노

점심에는 라테를 먹는다.



흥미로운 인생이다.



아무튼,

나는 아메리카노로 살면서

내내 그와 함께 했던

라테를 생각하는 방식으로

아메리카노는 식고 있고,

라테는 애초에 없을 뿐이다.



그래도 나는 아메리카노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방식으로

라테였던 기억이 아주 자세히

내가 나를 인정하는 만큼

더 선명하게 부인하게 한다.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나는 나를 이해시키는 중이었다.



내가 생각한 우리. 절대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우리도, 없이 살면

없이 사는 프레임에서 일단은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 날씨는 흐림인데 거기 날씨는

맑음이니까.



4년 전에 연락을 끊은 아는 동생이

오랜만에 연락 와서는

여행을 가자고 한다.



반가움과 아직도 같은 마음으로

대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의 흐름에

내가 놓인다.



나랑 그 사람도 4년이 지나서

내가 어김없이 다시 연락한다고

우리가 갑자기 "우리"로 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그에게 매일같이 씹히더라도

연락을 하는지도 모른다.



연락을 끊을 수 있는 것도 인연이라면

끊을 수 없는 것도 인연이니까.




나는 나의 집착 어린 연락의

어디에서부터 사랑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의 답장이 아직도 우리가

존재한다는 시그널이었지만,

이러한 매일의 연락이

어쩌면 각자의 인생을

버젓이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방식으로



혼자 하는 생각과

그의 연락이 오거나

내가 연락을 해서

즉시 바뀌는 생각의

색이 너무도 다르다.



나는 어디에 살고 있는가.



살고 있음이 어디임과 무관하게

나는 존재하는 것인가.



존재.라는 단어가 이제 흥미를

떨어뜨리는 중이다.



그가 이 세상에 있음을

몰랐을 때 떨어져 살 때와

있음을 알고 떨어져 살 때는

같은 단위의 현실을 살고 있을 뿐인데

그 상상과 기억이 지배하는

%가 상대적으로 많아질수록

기억의 온기가 상상으로

승화되는 일종의 산화 과정이 진행될수록

진실도 헛소리가 되는

그 절묘한 구분선에서




나는 온몸으로 그를 그리워하며

두 발로 내가 사는 곳을

걸어 다니고, 오늘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현재의 이중성.



나는 제대로 사냐고 묻기도 전에

나는 살아내고 있다.

단 한 번도 산 적 없는 프레임을,

그래도 오는 내일의 도움을 받고,

그래도 견뎌내야 하는 오늘의 지지를 받고,

그래도 기억나는 어제를 가슴에 묻고



혼란스러움에 서러워

울음을 참지 못할 때에는

이마트에 가서

와인 코너를 서성거리면서

시식 코너를 지나치지 않으면서

그렇게 "현재"를

살고 있는



라테를 버리지 못하는

아메리카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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