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난 상태의 의식 쾌적도는
총체적 난국이다.
움직이고
집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한 두 시간은
어떻게든 흘러간다.
운이 좋으면
산책 할 기분이 생겨
더 쾌적한 오전이 되는
방식으로
어떻게든 카페인을
섭취하기 전 까지는
움직이는 수면 상태이다.
꽤 햇빛에 노출되기
시작하면 기분 나쁠 이유가
없다는 쪽으로 의식은
그 편을 들어주고
그렇게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는 애매한
한 두시간이 지나면
그 날의 무드에 익숙해 진 방식으로
진짜로 기분이 좋은 상태가
어느 정도 지속되지만
날씨보다 변덕을 부리는
기분은 , 금방 좋아진 만큼
꼬ㅐ 빠른 시간 내에
괜히 짜증모드로 들어간다.
그러다 어디든 딴청을 피우고
있거나 커피를 한 두 잔 마시면
그로부터 한 두 시간은
나쁜 기분으로부터 안전한 방식으로
그 약발이 떨어지면
또 급 짜증이 올라오기에
내 안의 선비에게 급히 연락해서
마음의 평정을 찾는다.
그러다 보면
애매하게도 오후 5 시가
아주 쉽게 7 시가 되고는 한다.
그렇게 뭐라도 먹고 나면
잠이 오는 방식으로
저녁 내내 잠 투정을 부리다 보면
온 가족이 불을 끄는 바람에
그 때부터 깨는 잠이
오갈 데가 없다.
그 때부터 의식은 혼돈의 파티를
시작한다.
정체성의 시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여러 영상의 알고리듬에
일종의 노예가 된다.
아침은 반드시 왔고,
나는 이렇게 수동적인
패턴이 영원히 반복될 수 있는 방식으로
상황은 더 악화된다는 것을
배우는 중이었다.
지능이 있기에
어느정도 반복되는 이
패턴에서
쌓여가는 건
수동적 삶이 능동적일 수 있는
개체에게 보내는
불만이었다.
그 불만 때문에
더 짜증내는 개체로
존재하기를 선택하는
절묘한 이 기로에서
나는 나를 지키는 법을
본능적으로 터득하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가장 나를 주저앉게 하는 건
과거에 살아내지 못한
현실이었고, 과거는 이미
현재의 패턴에 습관화 된 방식으로
그 때의 현재와 존재를
놓치는 방식으로 지금 현재에
백 스페이스를 누르고 있는 건
그리하여 현재를 상쇄하는
주체는 바로 나라는 것을 안다.
난 더 이상 나를 변호해 줄
말이 남지 않았다.
그냥 움직이는 중이다.
수동이든 능동이든.
그러나 내 의식에 의해서
수동적이어야 한다면
능동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선명하게
알 것 같았다.
적어도 이제는
의식적으로
그렇게 선택할 힘을
키워야 한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