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블랙홀

by Romantic Eagle

어떤 것은 원할수록 멀어졌다.

원한다는 것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누구나 원할만한 것을 나도 원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누구냐는 질문을 오랫동안 해왔다.


그 해답을 찾은 순간 이후로도 계속 같은 질문하고 있다.

마치 그 질문을 더 하기 위해 알던 것을 일부러 잊으려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혹은 노력이 드는 일을 하기 싫기에 이 근원적인 질문에 안주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내가 요가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한창 요가 교육을 받을 때, 담당 요가 선생님께 나는 내가 누구냐는 질문을 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때 그 요가 선생님이 그런 질문은 그만두고 할 일이나 하라고 대답한 이후로 나는 요가를 하는 사람들을 물론 나를 포함해서, 특별히 더 사랑하지 않는다. 모든 직업은 비즈니스를 1순위로 할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줘서 감사하였다. 그리고 나는 자격증을 갖고도 요가 선생님을 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요가 선생님에 대한 환상이 사라지자마자 더 이상의 의미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의 기준으로(비즈니스의 기준으로) 요가를 가르칠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 보았다. 나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것이 어디까지 망상인지는 직접 그 비즈니스의 소용돌이에 있어야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냐,

그 해답은 기록하지 않을 것이다.

그 추상적인 것들을 기록한다는 것은 타인에게서 나를 멀어지게 할 뿐이라는 것을 잘 알았기에.

뭐 굳이 그렇게까지 생각을 해야 하냐부터 시작해서 오히려 내가 그 상대방의 단순한 인생에 대한 정의에 화를 낼지도 모른다. 티는 내지 않겠지만 말이다. 완전하게 화난 모습을 하고 있겠지만.


어찌하였든 서술하지 않아서 내가 정의하지 않을 나의 모든 것은 곧 모든 존재로에의 가능성이었다. 그러나 나의 정의가 불투명해질수록 내가 애착하여 곁에 있는 타인의 그림자가 되어가는 나를 인지해야 했다. 나를 놓아버려서 나에게서 자유로울수록 타인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특히 내가 중력 하는 타인과는 그 타인과 완전히 닮아가면서 나를 존재시키려 하였고, 나는 그 관성에서 벗어나기 버거움을 느껴야 했다.


그리하여 그 타인은 나에게 가장 순수한 방식으로 잔인하게 나를 그의 그림자로 만들었다 (이는 부모와의 관계에서 가장 직접적이자 간접적으로 자아가 형성되는 양상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나를 정말 지워가면 그 타인의 관심을 소유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주의"의 정의는 주의해야 할 때나 소용이 있듯이, 언제나 있을 것 같이 여겨지는 나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첫사랑은 그렇게 잔인하게 나를 깨우쳤지만,

한 번으로 깨닫기에 사랑은 너무도 환상적이고 사람은 너무도 이기적이었다.


내가 아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사랑받지 못한 나는 심리학 책과 뇌과학 책을 섭렵하며 나의 일련의 사랑받고자 하는 방식은 어린 시절 형성되다 만 애착을 저런 식으로 보상받으려 하는 여러 사례 중 하나라는 것을 이해해야 했다. 나라고 특별한 사랑을 할 수도, 어린 시절 고착된 애정 형성의 루프에서 벗어날 수도 일단은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했다.


나는 one of a case 였다.


이 깨달음은 나에게 부여한 내 정체성을 완전히 앗아갔다. 그를 깨닫기까지도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나는 비로소 아무도 아닌 상태로 아직까지는 누군가의 딸이어야 하는, 누군가의 누나여야 하는, 누군가의 친구여야 하는 불편함을 안고, 납득되지 않는 이 상황이 주는 불편함을 잊기 위해 먼 여정을 계획해야 했다.


난 이제 운명과 타협해야 한다. 이 선상에서 나는 운명이 이기게 둘 것인지, 다시 한번 이 "인간"에게 기회를 줄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 물론 다시 한번 기회를 줄 것이겠지만.


아무도 내 편이 아니다.

내 편이라고 "말"은 해도 결국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등을 돌릴 수밖에 없는 것을 알기에 나는 더 이상 내 주변인들을 비겁한 일시적인 "동료"로 만들고 싶지도 않다.


혼자.라는 것.


가치 있는 삶보다 보다 "같이"있는 삶을 원할 때가 있었다.

골드코스트에서 보모로서 남의 집에서 아이들을 돌볼 때 처음 실존적인 고독을 느꼈기에 "같이"가 간절했다.

그러나 운명을 해결하는 방식이 다른 같이하는 삶은

결국 그 둘을 평행 선상에 두는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자에 상대한 영원한 패배자의 삶도 싫고,

먼 길을 돌아와서 근거 없는 무용담을 자아내며

괴로워하는 비극을 연기하는 "비련의 여주인공" 역할도 지친다.

아무도 이미 나의 여정을 강요하지 않았고, 아무도 나의 무용담만큼은 관심이 없었지만.


나는 그리하여 운명에서 완전히 도피하는 방식으로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I'm not there yet.

I'm not dead yet, eit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