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사람은 없고,
어제의 증상만 현재 할 때

나는 비로소 내가 아닌 나를 마주한다

by Romantic Eagle

지독하게 지루하다고 정의하지 않으면 그런 지도 모를 주말은 버젓이 찾아온다.

나만을 찾아온 적 없는 방식으로.

주중에 일하느라 바빴던 사람들이 숨통을 트는 시간인 주말은 나에게 혼자만의 공간들이 침해당하는 매우 번잡한 날들로 다가온다. 지극히 개인적이기에 개인적인 공간에서 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말로 하면 내 친구인 K는 무슨 그런 말을 하냐는 식으로 반응한다. 당연한 반응이기에 나는 내 의사를 표현했다는 것만으로도 내 심정이 전달되었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반사되었겠지만.


나는 사람들을 안고 사는 법을 알지 못했다. 내가 여러 나라를 전전한 이유도 이 한국에서 벗어나겠다는, 나를 옥죄는 몇몇의 사람들에게서 일단 벗어나겠다는 심산으로 선택한 라이프 스타일이었다. 이 곳에서의 사람을 잊고 살다 돌아오면 변하지 않은 그들의 일상적인 반응이 나를 더 숨 쉬지 못하게 했다. 쉽게 말하면, 그들은 가만히 있는데 혼자 돌아다니다 돌아와서는 왜 당신들은 여전하냐고 추궁하는 패턴을 반복했었다. 나는 내가 나여야 하는 그들이 만든 틀에 갇힐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늘 생각했고, 그것이 바로 내가 심은 정체성이었다. 그것이 정체성이라고 거창하게 불리든 안 불리든, 나라는 인간의 뇌는 내가 저항하는 존재들에게 반응했다.


나는 곧 내가 저항하는 상대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 곳에서의 저항이 곧 저곳에서의 안정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었다. 이 곳에서의 반응하던 습관대로 외국에 나가서도 저항할 거리를 만들어서 늘 존재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내 어제를 증명할 만한 현재 연락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한 명이 있다면 내가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뿐인지도 모른다. 더 있다고 해도 그들에게 나는 결코 우선순위가 아니다. 결국 알았다는 전제하에 앞으로도 알 것 같지만 시간이 벌어질수록 오히려 한 번도 보지 못한 타인에 가까워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모든 정의를 내리다 보면 나는 사막의 향기가 나는 방에 앉거나 누워서 어제 흘리다 멈춘 눈물을 마저 흘리면서 어제 듣다 지겨워진 음악을 다시 틀고, 어제 보다가 끈 동기부여 영상을 틀어놓고 나는 그래도 오늘 무언가 발전을 했다고 "여기고" 쓰나미 같이 무턱대고 몰려오는 잠을 일단 자고 보는 것이다.


어제가 남긴 것은 현재 고장 난 심장이다.

더 이상 술도 마실 수 없고, 커피도 마실 수 없다. 절제력 없는 나를 비난하고 싶겠지만, 나의 사정은 당신들과 일단 무관하기에 당신들은 나를 비난하지 않는다. 안중에 없을 뿐.


어이쿠..

이렇게 나는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는 일단 불쌍한 사람으로 "아직 살아있는" 존재인 것이다.


병은 없는데 증상은 만연하고, 내 어제의 증거가 될 사람은 없는데 나는 그들과 함께 오늘도 살고 있다.

나는 시들고 있는데 어제는 기고만장해서는 나를 아직도 혼자 안에 갇힌 프라이드에서 수영하게 한다.

이렇게 글을 써내려 갈수록 나는 내가 만든 억울한 시나리오에 갇힐 명분을 제시하는 것 같다. 나는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절망적인 시나리오는 아니다.

다만, 이 것이 사실임을 알고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는 주변 상황을 어떻게 조건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임은 늘 알고 있었다.

나는 다시 여행을 떠나야 했다.


나의 고향은 머물 사람들이 관중이자, 연기자인 곳이기에, 나같이 부랑하는 절망적인 존재는 어떻게든 그들의 시나리오대로 끝이 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이미 루저로 낙인 되었기에, 나는 그 낙인을 이겨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이 맥락을 연결해나가는 순간에도 나는 나를 의심하기 때문이다.


매우 가끔, 나는 나를 주체할 수가 없다. 너무 잃은 게 많으니까.


나는 내가 자신 있게 돌아선 사람들을 잊은 줄 알았지만, 모두가 내 무의식에서는 내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이었음은 이렇게 증명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작별을 외친 거듭되는 차원에 갇혀 있는 "인간"이었다.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들을 생생하게 기억해야 하지만, 다시 만났을 때 우리는 지극히 타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할 때, 그 팩트를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이야 말로 나를 괴롭게 한다.


차라리 순진하게 받아들이면 모든 것은 그저 "모든 것"일뿐인데 말이다.


나는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가장 큰 반전은, 이를 다 알았어도 나는 똑같이 살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싶었고, 이 모든 것이 가지고 오는 심리적 무모함과 존재적 괴리의 수용력까지는 고려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를 통해 나는 나만이 만들어 낸 의식은 이미 죽음을 선언했는데 살아 숨 쉬어야 하는 몸이 그를 견디지 못하면 몸이 병들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무"를 살아내야 하는 "유"의 딜레마.


이를 통해 알게 된 것이 또 있었다--어떤 인간도 미치지 않았다는 것


이 말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내가 여기까지 쓴 글은 자서전이라기보다는 픽션이다. 이 글을 쓰는 순간 이 맥락으로 나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곧 이 글을 쓴 사람은 사라질 것이다. 글로 썼다는 생각 하나가 나를 이 생각에서 해방시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글이 불편할 수도 있지만, 이 글을 읽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전례 있는 관점으로 전례 없이 존재하다 전례 있는 마지막을 맞이하겠지. 그러나 이 글로 나를 너무 판단하지 않길 바란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이런 글을 쓰지 않을 수 있다는 말도 되기 때문이다.


이를 알기에 나는 타인의 일부만 보고 타인을 단정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리고 나는 그 딜레마를,

애정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