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um Rare, please
상처에 웰던이 웬말이냐 싶다가도
굿바이에 좋음의 의미 같은 건 없듯
웰-이라는 단어도 본질적으로 수지에 맞는 정도의
끝남이라는 뜻에 더 가까운지도 몰랐다:
웰던으로 굳은 심장보다는
어느정도의 상처가 보호하는
덜 익은 정도의 상처면 괜찮을 것도
같지만, 어떠한 잣대를 들이대든
한 사회에 소속된 , 한 조상의 가지에 종속된
한 인지 개체로서 견디는 쓰나미에
견줄 것이 아님에도
상처를 어떻게 해드리냐는 질문 자체가
와닿는 토요일이다.
슬픔에 잠기기에는
너무 울었다.
기쁘기에는
뭐.. 굳이.
한 존재의 세상이 무녀져가는 데도
특정 개체의 세상은 철저하게 보호되는 것만
같은 것을 보면,
결과적으로 내 인지 세상의 소유주는
나 인 방식으로
나의 슬픔을 아무도 건드릴 재간이 없듯
내 기쁨, 행복 또한 고유적으로 나의 것이자
내가 살아 숨 쉴 때나 고집적으로 유지된다는 것을
알아버리면
우울하게 있으려니 괜히
적자나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막 좋아라는 건 아닌데
절대적으로 우울에 빠져있는 단위의 값과
기쁨에 빠져있는 단위가 같은 방식으로
그 무드가 조장하는 세상은 꽤
다르다.
그렇다고 진짜 세상 다 잃은 채 살았던 지난
5 개월을 다시 살아라고 하면
나는 똑같이 살았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내 인격체와 이 개체가
인지하는 타인에 대한 기대, 실망 등으로
얼룩진 복합적인 혼돈을
답이 없는 방식으로 처리하는
고유의 피해의식 등으로 무장한
상실에 대한 내 자존심이었으니까.
지금 보이는 세상을 잃을 수 이미 없다.
그때의 세상을 숨 쉬는 의식으로
버텼듯이 잃지 않고 살았듯이
그리하여 지금
사후 확신 편향은
여전히 나의 서사적 자아를
쥐고 있는 방식으로
나에게
덜 슬플 수 있는 몇 개의
숨 쉴 구멍 정도는 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죽고 싶다는 사람에게는
무한 적선의 감정을 느끼면서
생명력이 강한 상대 앞에서는
무한한 질투심을 느끼면서
알 것 같은 건.
생명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건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 인지 개체가
그 개체의 영혼과 육체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끊임없이 자신의 상태를 파악하고
보호해야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라도
생명은 알았다.
이미 생존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걸 기쁘게 살든
우울하게 살든
기분과 무관하게
생명은 살 것이다.
죽을 때 까지.
그리하여 세상에서 단 하나
타협해도 괜찮은 상대가 있다면
그건 자신인 것이라는 것을.
자신의 불행하지 않음을 위해
자신을 불필요한 불행에서
건져내는 건, 그래도 지 라는 것을.
이끌려 나와봤다.
혼돈은 여전하고 상처도 여전하고
여전히 오열하며 그리운 사람 생각하며 울고
그와 동시에
요리를 해 먹고
커피를 마시고
운동을 하고,
그렇게 살아 있다.
10 시간 울 것을 10 분 울어도
그 슬픔은 같을 뿐이다.
다만 나머지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한 사람에게 집착적인 관성을
깨어가는 방식으로
나는 안다:
아직도 애틋하게
생각해야하는 사람 앞에서는
한 없이 약해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안다.
사랑을 알아버린 사람은
자신을 잃은 것 같지만
잃었다는 개념과 무관하게 삶은
이어진다는 것을.
그래서 마음이 일치하는 장소에 산다는 것이
2021년 생긴 목표이다.
현실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그냥 날이 좋을 때
오늘 날씨 좋다. 하며 배시시 웃고 있을 때
당신이 나한테 눈길을 주지 않으면서
내 눈길은 싫지 않은 듯 씩 웃으며
담배를 마는데,
그런 당신을 보고 다시
날 좋은 경치로 눈을 돌리는 그
0.34 초 동안 벌어지는 일이
아주 가까운 물리적 거리에서
일어나는 것.
영원히 현실같지 않지만
영원히 그리워해야하는
실제로 일어나는 그 순간들.
That maybe is everything about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