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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tic Eagle Dec 30. 2020

행복을 찾아다니기보다, 불행의 색을 옅게 만들어야겠어.

2021 년에는.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그대의 무관심에 의해 죽고

그대의 무-관심에 의해 세상을 다 가지고

그대의 목소리에 의해 내 목소리가 들리는데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그대의 무관심에 죽었어도 살아있을 때 하는

일련은 행위들은 다 하고,

그대의 무-관심에 의해 세상을 다 가진다고 해도

더 가질 수 있는 세상은 내 세상을 지나치지 않고,

그대의 목소리에 의해 내 목소리가 들리는 18 분을

제외하고도 내 목소리를 듣고 있는데.



영화 속 주인공이 나일 수 있던 시절이 그리운 건

더 이상 감동할 만한 영화가 없어서이고,

그렇게 더 이입해서 그들의 삶을 살았던들

나는 내 인생을 벗어난 적이 없었고,

더 이입할 수 없어서 무미건조한 인생이라고 치부한들,

나는 내 인생을 덜 살 수도 없다는 그 잘난

" 내 인생" 이 뭘까.



엄마 아빠가 출근하고 남겨진

시간이 일을 하지 않는 나에게 주는

일련의 공간적 향기가 15 살 때의 그

어느 시간과 다르지 않은 서른셋이 넷이 되고

있다.



엄마 아빠의 인생은 철저하게 그들의

세상에 전제하여 진행되었지만,

뭔가 종속된 그 형언할 수 없는 그

애착과 분리 그 어느 사이의 혼돈의 방에

갇혀서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한 나와

완전히 무관하게 나는 단 그 벽장 안에서

한 발짝도 나온 적이 없는 것 같다.


타인에게 내 영웅담을 들려주기 위해

여행을 한 것 같은데,

이미 타인은 그들의 영웅담에 취해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탕진하고 돌아온

어느 수요일이었던가.


내가 얼마나 기쁜 이야기를 하든

그들은 그들만의 우울한 스토리의 문을 열어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자신을 숨겼고,

내가 얼마나 슬픈 이야기를 하든,

그들은 그들만의 승리의 스토리의 문을 열어

그들의 행복을 지키려고 자신을 숨겼다.


나의 그대들은 오로지

내 시선에서 부재해야 나의 그리움을 샀고,

그들이 나를 통해 그리워하는 건,

익숙해서 통제하기 쉬웠다고 생각되는

나의 부재에 의해 자신의 공간을 메우고자 하는

일시적인 공허함을 메우고자 하는

부수적인 본능적 행위였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내가 그립다고 울부짖는 소리를

듣지 않는 그의 결정은 매우 현명한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사람의 오지 않는 답장은

내가 원하지 않는 사람의 오지 않는 답장과

완전히 값을 같이 함에도

내가 원한다는 그 수식어로 인해

한없이 자기 감이 쭈그러들어서

실제로 내가 언제 웃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나마 내가 웃을 때는

지금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웃을 때인데,

그 웃음과 "그" 웃음이 같은

근육을 사용하더라도

결코 같은 향기가 나지 않음이

내가 당신 향수 냄새를 잊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디올이었는데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신의 냄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거리가 멀어서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사랑" 은

거리로 따지는 게 아니다.

그 존재에 대한 개인의

믿고자 하는 일종의 "집착"에 의해서

잡히는 개념이 사랑이라고 했을 때,

실제로 빠른 시일 내에

적어도 5년이라는 시간 내에

아니, 결론과 목적을 대화하려 하지 않으려는

그 "마음" 이

이미 내가 잡아둘 수 없다는 것을 앎에도

더 이상 연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만 해도

역겨움이 몰려오는 이것은 무슨 감정일까..


당신의 존재가 빠져버린다는

그 세상을 살 것임에도

그 무한한 시공간에서

역겨움이 느껴진다는 것은

역행하는 시간과 역행하는 감정이

토해내는 기억이

내 몸의 모든 세포가 기억하는 것들이

저항을 하는 것이겠지.



그냥 2020년을 2020 년에 놔두고

그냥 제발 이 사람이 2021 년을 살았으면 좋겠는데

그때 그 시간과 그때 그 사람 마음을

지금 쥐고 있으면서 같이 사랑해달라고 하는 것 자체가

억지인 것을 아는데,



놓을 수 없어 어찌할 수 없는 내가

없는 답안지와 확인해 줄 사람이 없는

시간을 살아내는 방식에서도

물질이 오랜 시간 고여서 나는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유일한 환기구가 당신의 연락이라서

여기까지 왔지만,

당신의 목소리에는 산소가 없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겠지.



오랜만에 요리를 했는데,

가족들이 영 관심이 없다.

동시에 내가 하는 모든 요리를

하나하나 좋게, 조심스럽게 평가해주던

당신 생각이 겹치면서 그리워서

문자를 했지만,

당신은 대답이 없다.



적어도 하나는 안다.

한 사람의 역량이

자신을 읽어주는 타인의 역량에 의해

발달이 되고 진화한다는 것을

그 또한 그 상대의 부재로 인해

퇴화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어디까지나,

언제까지나

타인의 반응에 의해

좋은 반응에는 자신을 가지고

좋지 않은 반응에는 축 늘어져서 살건인지

나에게 물어본다.



상대가 영원하면 좋겠지만,

그 영원함에도 진부함이 언제나

끼어들고,

새로움을 원하는 게 괜히 미안해서

더 껴안아보기도 하고

꽃도 선물하고,

먹고 싶다는 거 사러 비행기도 타보고

그리하여 저 웃는 모습 한 번 더 보려고

내가 웃게 만들었다는 기분 한 번 더 느끼려고

사는

거지. 안 그래, 내 사람?



그 내 사람이 로그아웃을 하고

나는 타인의 웃음으로 먹고사는 내

자아를 묻는 방식으로

다른 자아를 짓기 시작한다.



나는 이제 이전과 같을 수 없다.

행복이 감당이 안 되는 사람이 있나 보다.

불행이 너무 짙었다.



2021년에는

행복을 찾기보다

불행의 색을 좀 연하게 만드는 작업을 해야겠다.



웃고 살자.


마스크가 다 가리고 있겠지만.



원형 탈모를 문신 즈음으로 생각하려고 했는데,

치료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일단 그것부터 시작하자

가슴만 텅 비어 가는 줄 알았는데,

머리도 같이 비어 가는 것 같다.

채우자.

나에 대한 애정으로.

그게 인류애의 기본 아니겠습니까.

자기라는 생명을 돌보는 것.



이러고도 또 그 사람을 찾아다니겠지만,

일단은 마음 가는 대로 둬본다.

이성적인 전제가 내리는 결론과

감정이 좇아다니는 결론은 차원이 다르니까.


 

그러다 지가 겪어야 그만하는 것들이

있을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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