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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tic Eagle Jan 20. 2021

개인주의 개인, 주의

같은 단어의 조합인데

개인주의는 개인의 사적임을

사색하게 하는 반면

개인, 주의는 개인을 피해야 할 만한

개체로 인지하게 한다.


두 가지 경우는 모두

개인을 이야기 하지만

“이제하여”

개인은

주의해야 하는 방식으로

개인주의는 거북스럽지 않게

한국인 특유의 집단주의의

개념 안에 자리잡는다.


개인주의라는 개념을

나 스스로도 정립시키기 어려운데

“이 사건” 이후로

가족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집단주의가 완화되었다.



한 개인이 단순히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이유로

바이러스 보유 가능성을 가지는 바람에

모든 공동의

안전을 위해

개인은 나를 비롯해

주의해야 하는 사람이 된다.



생존이라는 본질적인 가치

앞에서

개인이 개인을 위협한다.



그러나 더 멀어질 수도 없음이

가까워질 수 있음의 가치를 결정한다.


어쩌면 이 이전부터

우리는 같은 정도의

거리에서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유난히 같이있음에서

떨어져야 하는 거리에

대한 의식을 하면서부터

더 떨어진 것처럼 보이고

서로가 “사회적 거리”라는

현재 합리적인 거리가 명시되었기에

그렇게 “언어”로 정의됨으로 인해

멀어진 듯한 “감”에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거리의 명시로 인해

더 가까이 가도 될 명분이

생긴 사이도 있을 것이다.

애초의 둘 사이의 거리가

명시된 사회적 거리보다 멀었다면.



언어의

개입이

의식에 작용하는 효과는

있는 듯 없어 보인다.

없는 듯 있는 방식으로.



일단은 의식은 하지만

“사회 집단”에서

더 멀어질 수도 없는

더 가까워지도 않을

상황 속에서


“거리”

에 대한 생각이 들어온다.


사실 자신 밖의 모든 사건은

먼 사건들이다.

방금 아주 가까이서 스친 사람은

영원히 “알지”않을 사람인 가능성을

가진 방식으로

“알”지만

언제 볼 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새삼스러워진다.



사랑.


..



같이 있을 때도 이 정도로

폰을 붙잡고 뭘하는지

물어보지 않았는데

볼 수 없음을

문자의 조합으로나마

서로의 하루를

개념화하는 데

사용하지만

그리하여 온기를 느낄 수 없는

상대가 언제까지 나의

“상대”인지

정의내리고 싶지 않은 방식으로

그가 상대하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아니다.



말이 개입하여 가까워지는 게 있고

그 효과가 꺼지는 게 있으며

더 강화하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그

잠정적 결과와 상관없이

해야하는 말들이 있고

들어야하는 말이 있다.


사랑한다,

보고싶다,

감사하다,

고맙다,

미안하다,

좋다.


라는 말들도

상황에 따라

듣지 않은 상태가

나았을지도 모를 때가 있다.


그럼에도

그런 일련의

말로 인해

우리는 서로에게서

서로의 존재 가치를

정립해가는 지도 모른다.


말이 말인가 싶어서

입을 다물고 있어도

결국 중얼거리고 있는 말들은

뻔해야하는 말들이다.



어쩌면 그리하여

뻔하다는 개념도

뻔하다는 개념이 없다면

늘 새로워야하고

늘 필요한 말인가보다.


당신의 이름처럼

나의 이름처럼


불러 불러도

애틋해지는 그런


개인들이 있다.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 이 있는 개인일 수록

일반적인 거리가

멀어지고

그러한 마음 자체에

대한 개념이 생기지 않는

개인일

수록 일반적인 거리도 가까워보이는

그 상대성 속에서



당신을 만난 이후로

모든 사람과의

거리가 너무 가깝게 느껴지는 방식으로

이미 먼 거리가

아주 먼 것처럼 느껴지는



아주 일반적인

개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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