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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tic Eagle Oct 09. 2023

무엇이 나를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 나를 무엇하게 하는 것이라면



때로는

어떻게 하면

친해지고 사이가 더 좋아질

수 있는지 알기 때문에

애초에 일련의 친해질 만한

일을 벌이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이런 행동을 하면

그리고 이런 물건을 주고 받고

어떤 시간을 같이 보내면

사이가 더 깊어질 수 있음을

알기에 




그 행동만, 

그 물건만, 

그 시간만 같이 보내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하는 방식으로 





희한하게도 

거리가 유지되는 듯 보인다. 




그 선을 넘으면 항상

다시 되돌아와서 





그 전에 있던 

선 밖에서 

서로의 눈만 보지 않고 

신호등을 기다리는 

기이한 현상을 몇 번

목격하면





'절대' 해서는 안되는

것들의 리스트를 얻게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항상 예외를 적용하고 싶어지고

항상 그 예외가

말썽을 부리는 것이

그리고 그 예외를 위해

어떤 손실을 감수할 수 있음이

젊음의 회복능력의 소용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무료 관람권을 준다고 한들

보고 싶지 않은 영화의

리스트만 더 많아진다. 






그냥 그 시간에

다이소에나 들러서

필요하지 않는 물건만

잔뜩 사 와서

후회하는 시간이 

더 재미있고 

스릴 있는 지도 몰랐다. 









인연도 놓아진다면




세상에는 

불가능한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헤어졌는데. 




세상에 

불가능한 것이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내' 가 '당신'없이도

살고 있는데.




불가능한 것이 존재나

하는가. ..





우리도 성공적으로 헤어졌는데

그렇게 치면

나는 아주 많은 성공을

경험한 것인지도 모른다. 






헤어짐을 성공한다는 것. 

에 대한 생각을 한다. 




하지만

기억 속에는

성공적으로 잔류하는 것들은






내 인생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없지만

나는 끊임없이

그들을 소환해서




적막을 깨보려고 하는 

것 같다. 







만남도 운명이고

헤어짐도 운명이고

당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운명이라면





저항할 필요나 있나 싶다





단골 카페에서

마시는 

단골 커피의 

단골 기억 정도로 

승격 시키면





나의 현재는 

성공적으로 

괜찮은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한다. 







심심해서 



주말마다

타지의 친구 집에 지내는

동생에게 



집에 오면 

치킨 사준다는 말로 

집에 오게 할 수 없음을 

이해한다. 





동생이 와도

대화 보다는 각자의 방에 

있으면서 

각자 따로 치킨을 먹을 것이면서





그래도 

누군가가 집의 

적막을 깨어준다는 것의

 의미가

적지 않음에 대한

생각을 한다. 





그냥 혼자

사와서 잘 먹고 잘 자면

되는 것이다. 







희한하게도

나를 위한 

치킨 구매는 투 머치 같고

누가 집에라도 있어야

누구를 위한 연결이 있어야

선뜻

치킨 집에 들리는 수고를 

감수할 마음이 생긴다. 






그 이유는 잘 모르지만

그 생각을 할 때마다

흥미로울 뿐이다. 





치킨을 사서

집에 온다는 프레임은 

먹을 누군가의 '반김'을

'염두'에 둔 사회적으로 

획득된 관습이 만들어 낸

어떤 것임이 틀림없다. 





치킨을 사오는 수고가

나 아닌 감정적으로 연결된

타인의 인정, 반김, 기대가 

수반되지 않는다는 것이






상당히 

치킨 집을 방문하는

동기를 떨어뜨리는 것 같다. 







그래도 오늘은 

방문할 계획이다











그냥. 

그런 생각들. 





이제는 

'물건'을 매개로 

'누군가'를 곁에 둘 수 없음을

안다. 



사탕 하나 더 사준다는 것으로 

아이들을 곁에 둘 수도 없었다. 






아이들은

스테이크나 랍스터나 호텔 뷔페의 가치를 

아주 잘 알았다. 










지금 쯤 누가 곁에 없다면 

다음 누군가는 

한, 삼 십년 뒤에서야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 





그 때까지 살아있다면

,




왜 30년 이후에 

살아있는지에 대한 의심을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보장은 할 수 없는 것 같다.






'우리'도 헤어졌으니

나도 세상과 헤어지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세상에 불가능은 없으니. 




어떤 방식으로든. 









일어는 났는데 

왜 일어났는지. 

잘 모르겠다. 



내 인생을 

욕하면서도 

서른 몇 년을 잘 

버틴 것에 대한 생각을 한다




이럴거면

좋아하면서 

버틸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매 순간

잘 자든, 못 자든,

기름진 음식을 특별히 더 먹은

날인든, 

커피나 초콜릿이나 알코올을

특별히 더 먹은 날이든, 

덜 먹은 날이든, 






나를 괴롭히는

그 기준은

본인이다. 





사실 

어느 누구도 

이 인생에 관심이 없다





모두는 자신의 삶에 

일단은 

사로잡혀 있기에 





그렇게 의식한 타인들은

지금 옆에 있지도 않고 






그렇게 싸우던 

대상들도 

이제는 자기 인생 산다고 

바빠서

내 이름도 기억할 수 없다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




초등학교 때에는

속이 안 좋아서 

토를 하고도

친구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화장실 간다는

말을 못하고

무슨 말을 못 해내는 아이라서 


울면서 토를 다시 삼키던 아이였다. 







그 때 신경쓰던 친구들도 

지금은 없다








무엇을 위해 싸웠나 싶고

무엇을 위해 부끄러워했나 싶고

무엇을 위해 울었나 싶지만





그리하여 무엇을 위해 살았고 

앞으로 살아야 하나 싶지만, 





어쩌면




질문이 이상한 것 같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음이 우리를 무엇하게 한다. 






살아있음이 나로 하여금

이 시간에 

한국어를 사용해서

감정을 2차원(?)의 결과물로 변환하는 

행위를 하게 하듯이







선선한 날씨이다





어느 시점에서는 

어떤 종류의 훌륭한 질문도

시끄럽다는 생각을 한다. 





그냥 이

온도의 공기가

내 살갗을 스침을 

쾌적하게 기억하는 

이 순간




고요함 속에 

느껴지는 나의 내적

웃음에 집중하고 싶다. 







물론 다음 순간에는 

집 청소 하느라

청소기 소리로 시끄러울

프레임이겠지만, 





이런 종류의 삶도 

내 삶이라는 것을 

이어가는 중이다. 







오늘은 

살아있음이 

나로 하여금

집 대청소를 하게 

할 것이다. 














?

ㅋㅋㅋ

키역

이라고 쓰다가

구글을 찾아보니

키읔이라고 한다.



이 키읔 세 개가 

나를 언제나 웃기는 것 같다. 






한국인에게 

ㅋㅋㅋ는 상당한 

의미의 밈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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