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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tic Eagle Oct 29. 2023

묻혀 있는 금이라고 빛이 나지 않지 않았다

 내 눈 앞에 없다고 해서 당신이 없지 않다는 것을 안다는 것

집이라는 공간

인테리어

나의 소유로 보장된

공간의 유무

부엌

거실

햇살이 입장하는 

방향, 등.




즉,

모든 '개인'이

'집에 가야 한다'라는

말을 하겠지만

그 '집'이 

상징하는 의미는

하나같이 다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내 이야기'를 

'내 목소리'로 

운을 떼지만



사실상 

인터뷰도 아니고



하루 어땠는지

물어보는 사람은 거의 

없고



혼자 기분이 내키면

자랑하고 싶은 이야기나

억울했던 이야기의 운을 

떼지만, 




그 순간

그 내용이

궁금하지 않은 

상대방은



얼마나 

피로 엮이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함께 했느냐와

별개로 



'일단'은 

고개를 돌려 들어주지만, 





내 입장에서도 

내 이야기의

절반 이상이

새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면, 




그리하여

'대화'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하고 끝나야 하는지

의문스러운 방식으로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재잘거리며

이야기 하는 

아이들의 이야기의

절반 이상만 

들리고 



영혼 없는

대꾸만 해주는

본인을 발견한다. 





그래도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하는 사람과




이럴거면

그냥 말을 말지

라고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의




오고 감

사이에 




절대 내 이야기를 

하나 봐라!


이러고 

틈만 나면

내 이야기를

어떻게든

이해시키려고 하는 

본인을 보며,




그럼에도 

나보다 

자기에게 관심이 많은

무수한

대상들을 거치며





그리하여 

내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있는 순간이

얼마나 귀한지 아는 방식으로 




그리하여 

그 숱한 대조군 덕분에 



누가 내 어떤 정보에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아는 순간에도





누가 어떤

연기를 펼치는지

알 길은 없었다. 하지만 






내 말을 내 눈을 보며

합치면 3분도 안될 것 같은 

짧은 브리핑을 

연기라도 해서 들어주는 

사람이 절실할 때가 있었다. 





그리하여

혼잣말이 늘었다. 




내 이야기는 

'내나' 궁금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를

잘 안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기회만 잡으면

하고 싶던 이야기를

봇물터지듯 쏟아내는지도 모른다. 




언제 자신을 향한

시선과 관심이

증발할 지 모르니까. 





물론 그 사람은

'나'인 것 같다. 







그리하여

내 삶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에게

과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

생긴다. 




그래서 또 혼자

좋아하게 되고 

또 실망하게 되고, 

또 일요일이 오고

다이소에 청소 약품을

사러 갈 생각으로 

일요일을 채우는 것이다






전화 걸 상대가

없어서

슬프지는 않다



하지만

나에게 없는 것을

바라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

소정의 슬픔이

 느껴지는 것 같다




사실


아빠는 내 전화를 

잘 받으신다. ㅋ




그리하여

전화 할 상대가 없다는 건

그 '상대'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과

그 상대의 

전화번호를 

정확하게 모르는 것을 반증하는

방식으로 



전화번호를 

안다고 한들

접근이 가능한 영역은

아니었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까지만 듣고 

빨간 버튼을 눌러야 하는 건

그 민망함의 몫은

다시 

나일테니. 







사실 엄마 

목소리가 

조장하는 주파수는

잔소리의 주파수라서

내 뇌리에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나 

같이

쇼핑을 가거나 하면



그 점원들은

엄마 말에 

하나 하나 반응을 

해주는 것을 목격하면서





결코 

가족으로서 

해줄 수 없는 반응은

신용카드를 매개로

처음 보는 타인에게는 

일종의 반응을 해야 하는

의무로 다가올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 





인생에서

가족이 아닌

'타인'의 중요성은 어쩌면




큰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씹히는 내 말과

이야기도 




누군가는

일단 들어줄 수 있는 

것에의 가능성인지도 

모르고



그 순간 순간의

환기가





개인이

답답하게 여기게 된 세상에서

숨을 쉴 수 있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하는 것 같다. 









묻혀 있는 금이라고 

빛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내 눈 앞에 

없을 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도

보인다고 있는 것도 

아닌 그 어느 즈음에




나의 가시성과

비가시성? 의 그 어느 즈음에 




거울을 보며

내가 있는지 확인하며

사는 중이다





사실 일주일을 

표본으로 정하고 

살아보면



내 얼굴을

제대로 보려는 사람은

한 두명도 안되었다. 



본인을 비롯해서. 





(캔맥을 따는

나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또 마시냐는 눈빛으로 

째려보시는

엄마를 제외해야 하겠지만.) 




보고 안 보고가

중요한가 싶다. 



누군가는 보고 있어도

보고싶고, 

누군가는 보고 있어도

뭘 봐야 하는지

모르겠을 뿐인 사이에



월요일은 성공적으로 

토요일이 될 뿐이다. 




연금 납부 내역서 같은 것이

왔는데 

내가 65세까지 

그 돈을 내면

받을 용돈이 적혀있다. 




문득 내가

저 나이가 될 때까지

살 수 있을 것이

보장되지 않는데 



다달이

돈을 낸다는 것은

어디에서 나온

발상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혹시나 해서'

내는 돈이

얼마나 합리적인지에 

대한 생각을 한다. 





혹시나 해서

당신이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건 아닌지

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

얼마나 비합리적인지에 

대한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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