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이미 하기에, 좋아할 일만 남는다는 것을.
아파트 처음 입주해서
자주 만나는 분들은
항상 밝고 명랑한 미소로
마주침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일 여년이 지나면
서로에게 제공하던 무상의
친절을 거두기 시작한다.
어쩌면
그 친절의 무중력 상태가
우리가 고수해야 할
본질인 지도 모르는 방식으로
어쩌다
마주쳐서
밝은 인사를 나누게 될 확률이
이미 생각보다 적었음을
깨닫는 중이다.
그러함을 깨닫다 보면,
그리하여
한창 해맑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음이
대견하고
그리하여 사랑에 빠질 수 있었음이
꽤 칭찬할 만한 방식으로
같은 방식으로 사랑에 빠질 수 없는
지금에 대한 생각을 한다.
금사빠가
혼이 나는 세상에
사는 1인으로서
이제와서 깨닫는 건.
금사빠에게는
'금방'도
느린 개념인지도
몰랐다.
이미
사랑에 존재하기에.
어찌 아이의
그 모든 것을 이해해주겠다는
웃음과 사랑을
금사빠로
정의하여
섭섭하게 할 것인가.
어쩌면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아이의 시선. 세상을 향한
사랑에의 믿음을
고수하는 한 사람으로서.
금사빠라서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면
속도를 요구하는 세상이
비겁한 지도 모르는 방식으로
금방 빠지는 사랑은
의심의 가치만 있는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사랑해서 미안하다는 감정이
선점하는 이 기이한 현상에 대한
생각을 한다.
사랑하면 바라만 봐야 한다는
개념에 대한 생각을 하며
아주 가까이에서
마주하고 싶은 사람도
어쩌면 개인적 욕심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할 때
내가 좋아하는 그대가
나를 좋아할 확률이
존재나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는 방식으로
금사빠라서
부끄럽지는 않지만
이 금사빠라는 개념이
얼마나
누군가를 부담스럽게 할 것인지에 대한
이해를 시작한다.
골드코스트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스무살의 나는
여기가 과연 죽을 가치가 있는
곳임을 기약한다.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음을.
그 생각 이후에 십여 년이 지나
그 아이는
2024년의 끝자락에
서 있다.
죽으려고 헤엄쳐 간
바다를 등지고
해안선으로 발버둥치며
그래도 살아있음에 대한
개념을 정립한다.
그 시점 이후로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많은 변화는 없었던.
살아있음이
다시 사랑에 '금방' 빠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고,
그 삶을 제공해 준
부모님에게 너무 감사한
시간이다.
비로소 그대를 만나게 하였으니.
그러나
누군가를 만났음이
반드시 사귈 수 있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함께
이해하려 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