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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민 May 11. 2019

제자리 멀리뛰기

어쩌면 나는 내 생각보다 더 멀리 뛸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운동회를 했나 보다. 거리에 쏟아져 나온 아이들 모두 흙이 잔뜩 묻은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내 앞을 걸어가던 한 꼬마는 달리기에서 1등을 했다며 목에 걸린 메달을 들고 자랑하다가 뒤로 엉덩방아를 쾅 찍었다. 주변 아이들이 깔깔 거리가 떠나가듯 크게 웃는데도, 아이는 그래도 좋은지 친구들을 따라 깔깔 웃었다.





나도 쟤네만 할 때 체육 엄청 좋아했었는데. 하얀 체육복이 흙으로 얼룩덜룩해질 때까지,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놀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여전히 나는 몸을 움직이는 일을 좋아한다. 뛰고 구르면서 땀을 한 바가지 쏟아내고 나면 뭐랄까. 내 심장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크게 들리면서 살아있다는 기분이 들어 좋다. 달리기 시합을 하고 나서 숨이 차 목구멍이 따꼼따꼼 거리는 느낌도 좋아하고, 팔 안쪽 근육이 당기는 느낌도 좋아한다. 몸을 움직이고 나면 생기가 돌고 늘 기분이 좋았다.


체육을 좋아했지만 체력측정은 싫어했다. 좋아하는 일이 점수로 매겨지는 건 뭐 참을 수 있었는데, 매겨진 점수가 반 아이들 모두에게 공유되는 건 정말이지 싫었다. 그중에서도 제자리멀리뛰기는 최악이었다. 선생님 입장에선 짓궂은 초등학생을 한눈에 컨트롤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겠지만, 나는 반 애들이 제자리멀리뛰기를 하는 애를 동그랗게 싸고 앉아서 구경하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다른 종목보다 제자리멀리뛰기에선 기록과 인지도에 따라 아이들이 바로 반응을 보냈다. 반에서 인기가 별로 없어도 기록이 좋게 나오면 온갖 호들갑을 다 떨며 오~하며 호응을 해주는데, 나처럼 인기도 없고 기록도 별로인 애에겐 민망할 만큼 반응이 없었다. 눈치 없는 담임 선생님은 기록을 재곤 큰 소리로 외쳤고, 반장은 선생님이 불러주는 기록을 받아 적었다. 기록은 모두에게 공유되었고 비밀은 없었다.


제자리멀리뛰기를 할 때면 손에 땀이 잔뜩 났다. 그어진 출발선 앞에서 땀을 바지에 벅벅 닦고 주먹을 꼭 쥐던 나. 한 번은 너무 긴장한 탓에 오금이 저렸다. 출발선 앞에 서서 한참을 뛸까 말까 망설였다. 심장은 달리기를 했을 때보다 더 크게 요동쳤다. 출발선에서 앞서 뛴 아이들의 발자국을 보는데 너무 멀어 보였다. 다들 나랑 키도 고만고만하면서 어떻게 저렇게 멀리 뛸 수 있는지. 아이들은 다 나만 쳐다봤다. 기가 잔뜩 죽은 나는 스텝이 꼬이며 발을 헛디뎌 출발선에서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우스꽝스럽게 넘어진 나를 보면서 반 애들은 큰 소리로 웃기 바빴고, 나는 아픈 것보다 창피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스물다섯.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를 만난 뒤, 내 인생엔 수많은 기회의 문이 열렸다. 꿈만 꾸었던 일들이 현실로 내 앞에 펼쳐졌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마치 제자리멀리뛰기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주어진 기회에 감사하고 기쁘면서도, 불안했다. 좋은 기회들이 나를 찾을 때마다, 나는 내가 가진 역량보다 사람들에게 더 좋게 포장되는 것 같아 두려웠다. 언젠가 나를 둘러싼 예쁜 포장들이 사라지고 진짜 내 모습이 나타났을 때, 사람들이 나를 비난할까 봐. 그래서 나는 브런치 출간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을 때도, 내 책이 교보문고 신간 매대에 진열되었을 때도 마음껏 기뻐하지 못했다. 내가 맘껏 행복을 누리면 그 행복은 금방 사라질 것 같아서. 물거품처럼 바스라질 것 같아서.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은 나를 점점 움츠러들게 했다. 아무리 좋은 기회가 찾아와도 나는 나를 인정해주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를 낮추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정리되지 않는 말들로 횡설수설하기 일쑤였다. 마치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괜찮은 사람이 아니에요, 사실 저는 별로인 사람이에요 라고 홀로 변명하듯이. 모두가 동그랗게 둘러앉아 나만 보는 것 같았다. 혹 내가 엉덩방아라도 찍으면 큰 소리로 비웃지나 않을까. 거 봐 쟤 저럴 줄 알았어, 비난하지 않을까 싶어서 늘 불안했다. 마치 제자리멀리뛰기 출발선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어린애처럼.



선생님은 엉덩방아를 찍은 내게 한 번 더 출발선에 서라고 하셨다. 엉덩이를 털고 다시 출발선 앞에 섰다. 내가 저 멀리까지 뛸 수 있을까, 또 넘어지진 않을까 두려웠다. 찔끔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친구가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야, 그냥 아무 생각하지 말고 뛰어. 뛸 수 있다고 믿고 뛰면 돼. 저기 생각만큼 멀지 않아. 친구의 말에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꼬옥 쥐었다. 그래 그냥 뛰어보자. 아무 생각 없이 뛰어보자. 내 한걸음이 저기까지 닿지 못하더라도 어차피 뛰어야 한다면 뛸 수 있다고 생각이라도 해보자. 나는 손을 앞뒤로 힘껏 흔들다가 발을 떼었다. 푹신한 모래 위로 두 발이 무사히 착지했다. 아까와 다르게 아이들이 내게 오~ 하는 긍정적인 호응을 보냈다. 뒤를 돌아보니 출발선으로부터 꽤 멀리 와있었다. 나는 내 생각보다 더 멀리 뛸 수 있는 사람이었다.


대상을 받고 출간한 첫 책은 화려한 홍보에도 판매가 부진했다. 정말 열심히 준비한 두 번째 책은 출간되고 5일 만에 대형 유통업체가 부도가 나 출판업계 전체가 휘청거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홀로 모두 앞에서 엉덩방아를 찍는 기분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나를 찾아주는 사람들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나를 발견해서 기쁘다고, 당신의 문장에 위로를 받았다는 편지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나조차도 믿지 못하는 나를 믿는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들의 진심 어린 사랑에 나는 조금씩 일어날 수 있었다. 그들은 동그랗게 나를 둘러싸 보고 있었지만, 그들이 내게 건넨 말은 놀림이 아니라 격려였다. 할 수 있다고, 다시 일어나서 뛰면 된다고.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더 이상 출발선 앞에서 넘어져 있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나는 내 생각보다 더 멀리 뛸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제자리멀리뛰기란 손과 다리를 박자에 맞춰 크게 앞으로 흔들다가, 한 숨에 나를 던지는 운동. 이왕 뛰어야 한다면 잘 뛰어보고 싶다. 비록 넘어진다 하더라도, 점수가 좋지 못하더라도. 내게 찾아온 소중한 기회들 앞에서 망설이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그냥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 보고 싶다.


두려움으로 발이 묶였을 때는 알 수 없다.

내가 얼마만큼 뛸 수 있는 사람인지.





2019년 5월 11일 청민의 말:


사랑한다는 건 뭘까요.

사랑이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요.


글쓰기를 생각하면

괴롭고 후회스럽고 미우면서도

자유롭고 고맙고 행복합니다.


이것도 사랑이라 불러도 될까요?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있는 이 감정을

저는 사랑이라고 불러도 괜찮겠지요?


지난 4년간 저를 감싸고 있던 감정들을 담은 글입니다.

쓰고 나니 조금 후련합니다.

오랜만에 생생히 살아있는 기분도 듭니다.


이제 조금씩 다시 앞으로 나아 가보려 합니다.


제가 나아갈 수 있도록 기다려준 당신과

오늘도 찾아주신 당신께 감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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