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민 Nov 23. 2019

좋아하는 것이
먹고사는 '일'이 될 때

원체 먹고사는 일이란 게 그렇고, 돈을 버는 일이란 게 다 그러니까.

#청민의플레이리스트│커피소년 - 어른이 되고 싶었죠

"어느 날 어른이 됐죠. 커피가 쓴 걸 알았죠. 그리고 어른들의 영화도 그리 아름답지가 않았죠.
어른이 되면 울지 않을 줄 알았죠. 가슴으로 울어야 하는진 모르고."

오늘 하루도 잘 이겨낸 모든 이에게, 수고했다고 말하고 싶은 밤. 수고하셨어요, 오늘도 :)






찬장에서 엄마가 깊숙이 숨겨둔 크리스탈 잔을 꺼내, 빛이 잘 들어오는 베란다 탁자에 세워둔다. 창밖의 하늘엔 귀여운 구름이 동동 떠 있고, 구름을 걷힌 따듯한 봄빛들이 잔을 비춘다. 환하게 빛나는 잔을 보며 어떤 색깔로 잔을 채울까 한참을 고민하다 생각한다. 오늘은 구름처럼 몽실몽실한 카푸치노를 만들어 먹어야지, 달달하게 연유를 넣어서.




좋아하는 일은 영원히 좋아하는 일로만 간직하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좋아하는 일은 웬만하면 직업으로 삼지 말라고, 좋아하는 일은 그저 좋아하는 걸로 간직하라 했던 선배들의 말이 출근할 때마다 자꾸 떠올랐다. 그 말을 들을 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어, 하면서.


처음에는 좋아서,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까지 벌 수 있어서 시작했다. 커피도 좋고 카페라는 공간이 주는 로맨틱함에 사로잡혀 카페에서 일하기 시작했지만, 로망은 언제나 그렇듯 연약했다. 좋아하는 곳이 일터가 되는 순간, 좋아하는 마음은 그대로 일이 되었다. 좋아하는 것과 일은 다른 문제였다. 일은 좋아만 할 수 없으니까, 거기엔 책임감 이란 이름이 붙으니까. 책임감이라 이름 지어진 일은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작은 긴장은 물론 나를 성장시켰지만, 매일매일 쌓이는 긴장은 나를 서서히 지치게 했다. 쏟아지는 주문에 땀까지 흘리며 정신없이 샷을 추출할 때면, 때론 내가 커피를 찍어내는 기계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루 종일 서 있느라 다리는 퉁퉁 붓고, 설거지는 해도 해도 끝이 없었으며, 소모품은 왜 이렇게 빨리 떨어지는지. 매일 똑같이 바쁘고 힘들게 흘러가는 하루에 진이 빠지는 날이 잦아졌다. 예전엔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했는 데, 카페서 일을 시작한 이후론 카페에 잘 가지 않게 되었다. 뭐랄까, 커피를 사 먹는 게 돈이 아깝게 느껴지기도 했고, 카페에 가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속으로 여기 커피는 어떻고 저기는 어떻고, 자꾸 무언가를 판단하려는 내 모습이 별로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점점 어딘가 모가 생기는 나를 보며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가만히 고민하다 깨달았다. 아, 내 커피가 없었다. 언젠가부터 이런저런 이유로 나를 위한 커피는 서서히 사라졌다. 하루 종일 남을 위한 커피를 만들면서, 정작 나를 위한 커피는 어디로 간걸까. 출근해서 커피를 내려 마셔도 무언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던 게 내 커피가 없기 때문일까. 마치 빈 잔처럼.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고,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빈 잔처럼 스스로가 느껴지게 된 이유 말이다.


비어버린 바닥을 보고서야, 나를 위한 커피를 짬을 내어 만들어 보기로 했다. 매일 하루에 한 잔씩, 정성을 다해 대접하는 마음으로 내게 커피 한 잔을 내어 주기로 했다. 멀리 가지 않고 집에 작은 홈 카페를 열었다. 엄마의 찬장 속엔 예쁜 잔들이 많으니까. 가장 편안한 공간에서 가장 예쁜 잔을 골라 나만을 위해 커피를 내린다. 원두를 곱게 갈고 여과지에 원두를 담아 뜨거운 물로 천천히 원을 그려 원두를 적신다. 온 집안에 고소한 향이 조용히 퍼진다. 물을 머금은 커피가 여과지에 또르륵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또르륵 또르륵, 소리를 들으며 나를 어떤 커피로 잔을 채우고 싶은가 고민한다.


비가 내리는 날엔 노란 꽃이 그려진 잔에 따듯한 카페오레를 담아 마셔야지, 하늘이 맑은 날엔 크리스탈 유리잔에 연유를 넣은 아이스 카푸치노를 담아볼까,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엔 곰돌이가 그려진 머그잔에 진한 모카라테를 채우면 좋겠다. 나만을 위한 고요한 시간이 차분히 펼쳐진다. 그저 좋아하는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천천히 물어본다. 괜히 평소엔 잘 떠오르지 않던, 썩 괜찮은 레시피들이 마구 떠오른다. 비어있던 나의 잔이 천천히 차오르는 기분이다.



살다가 자주 빈 잔이 되곤 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어도, 좋아하진 않지만 잘하는 일을 하고 있어도 나는 자주 빈 잔이 되곤 했다. 원체 먹고사는 일이란 게 그렇고, 돈을 버는 일이란 게 다 그러니까.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의 빈 잔을 조용히 채워주는 일이 아닐까? 가장 편안한 공간에서 스스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조용한 시간을 주는 것. 삶을 지치게 하는 것을 잠시 떼어놓고, 마냥 좋아했던 기억을 더듬어 보도록 여유를 내어주는 것. 모두가 잠든 밤 의식의 흐름대로 일기를 쓰는 마음으로, 아주 예쁜 잔에 나만을 위한 커피를 담아본다.


오랜만에 만든 카푸치노는 포근했다. 손으로 곱게 낸 우유 거품에 입술이 폭 닿으니 작은 기쁨이 나를 간지럽혔다. 크리스탈 잔에 담긴 나의 커피는 오늘따라 반짝거렸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내려진 커피가 아닌 오직 나만을 위한 커피. 핸드폰으로 커피를 찰칵 담으며, 나는 주섬주섬 앞치마를 출근 가방에 챙겼다.




2019년 11월 23일 청민의 말


지금은 커피를 만드는 일을 그만두고,

책을 만드는 곳에서 책을 알리는 일을 합니다.

여기서도 일상은 똑같이 흘러갑니다.

어떤 날은 좋고, 또 어떤 날은 잔뜩 긴장하고.


마음이 조금 어려운 날엔 시간을 내어 카페에 갑니다.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며 좋아하는 책 한 권을 읽습니다.

그럼 불안했던 어떤 마음이 조금 괜찮아집니다.


커피 한 잔과 책 한 권.

좋아하는 마음으로 다시 힘을 내어 내일을 살아갑니다.

따듯한 토요일 되셔요, 감사합니다 :)





청민 Chungmin
* mail _ romanticgrey@gmail.com(매주 토요일에 답장합니다)
* insta _ @w.chungmin :여행/일상 계정
               @chungmin.post : 컬처/브런치 알람/작가 계정 + 휴재 공지


댓글과 좋아요, 공유는 힘이 됩니다 :)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언젠가 서로의 곁을 떠나겠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