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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민 Dec 28. 2019

[2019 결산] ① 월간 청민 여행

익숙한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2019년 연말정산, #월간청민여행

* 연말을 맞아 올해의 여행 일부를 정리했습니다.

* 여행지 소개라기 보단, 여행을 다녀온 감상 위주입니다. 분량이 길어 지루할 수 있습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청민의 글도 함께 넣어두었습니다.






* 2019년 1·2월│익숙한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취업을 했습니다. 이력서를 쓰고 1차, 2차 면접을 보았으며, 12월 말에 인사팀에서 합격 소식을 전달받았습니다. 출판사에 취업을 했습니다. 사실 면접에서 심하게 말을 못 해서 마음을 접고 있었는데, 1차 면접을 보러 오라는 소식에 놀랐고, 2차 면접을 보러 오라는 소식에 또 놀랐습니다. 그리고 망했다며 마음을 접었을 때 출근하라는 말에 다시 놀랐습니다.

처음으로 진정한 독립을 했습니다. 회사 근처로 기차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집을 구했고, 회사 근처에 비싼 월세방을 구했습니다. 대구집에 있던 집을 하나씩 상자에 담으며 이사를 준비하는 데 기분이 이상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이사를 많이 다녀서 뭐 동네 하나쯤 떠나는 건 이젠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집을 떠나려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대구가 좋아지고 있었거든요. 삶은 좋았던 것을 너무 빨리 데리고 가는 습관이 있습니다. 저는 그 습관이 아주 고약하다고 생각하고요.



혼자 가도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온 가족이 저의 새 집에 함께 올라왔습니다. 집도 좁은 데 자꾸 짐을 챙긴 엄마 덕에, 수저 한 벌만 있으면 바로 신혼집을 차려도 될 것 같단 실없는 농담을 많이 했습니다. 엄마는 집을 쓸고 닦고 동생은 근처 다이소에 가서 쓰레기 봉지와 급히 필요한 물건들을 사 왔습니다. 엄마는 짐 정리를 하고 동생은 무거운 짐을 옮겼습니다. 수능을 보고 나오던 날이 떠올랐습니다. 엄마에게 데리러 나오지 말라고 말라고 고집을 피워놓고, 시험을 치며 퇴실하며 느꼈던 온갖 쓸쓸함이 떠올랐습니다. 저 멀리 엄마와 아빠와 동생이 오지 않았더라면, 저는 아마 쓸쓸함에 잡아먹혀 어디 구석에서 울다가 집으로 갔을지도 모르거든요.

혼자가 아니라 다행인 날들이 늘어납니다. 낯선 도시, 낯선 공간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을 뒤늦게 했습니다. 출근 전날엔 아빠도 올라와 그 좁은 집에 네 가족이 구겨져서 떠들다가 잤습니다. 새집엔 내 익숙한 사람들의 온기가 잔뜩 묻었습니다. 엄마는 그렇게 일주일 정도 있다가 다시 대구로 내려가셨습니다. 가족이 남기고 간 사랑의 온기에 저는 쓸쓸하지 않게 지냈습니다.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인 날들이었습니다.



하나의 생명이 가족에게서 떨어져 나와 독립을 했습니다. 자신만의 진정한 삶을 꾸려가는 첫 발을 내디딘 거죠. 저는 이게 여행 같았습니다. 엄마는 언제나 우리 삶은 나그네 여행길이라 하셨거든요. 혼자 사는 삶은 저를 이전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회사라는 공간이 주는 영향도 어마 무시했습니다. 제겐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물론 일상을 떠날 숨구멍도 필요했고요.


그래서 여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1달에 1번이라도 어디든, 일상을 떠나보기로 했습니다. 2019년이 끝나는 지금 돌아보니 잘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부지런히 돌아다녔다고 생각해보려 합니다. 내년 이맘때 연말 정산을 쓰고 있을 적엔, 더 많은 여행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일상을 떠나면 제가 보입니다. 두고 온 나를 이상하게 더 생각하게 됩니다. 나를 알고 싶어, 내 삶을 찾고 싶어 올해 자주 일상을 떠났습니다. <월간청민여행> 여행의 기록이자, 여행에서 했던 생각들을 기록한 짧은 기록입니다. 인스타그램에 주로 짧게 올렸고, 오늘 이 글은 그것들을 엮었습니다. 아마 아주 긴 보고서가 될 것 같습니다. 지루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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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3월│강릉


동해바다는 언제나 멋있습니다. 집채만 한 파도가 저 멀리서 고래처럼 유연하게 헤엄칩니다. 그렇게 컸다가 내 발에 오면 애걔 싶을 정도로 작아집니다. 바다를 보며 관계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차피 부서지고 무너지고 작아질 거, 뭘 그리 마음을 쓸까 싶은 날도 있습니다.


그래도 바다는 언제 보아도 아름답습니다.









* 2019년 4월│춘천


춘천은 살면서 가장 아팠던 곳, 그래서 한때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곳, 늘 떠나고 싶었던 곳.


그리고 춘천은 그런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가는 곳, 먼저 손 내밀어 준 곳, 아름다운 첫사랑의 흔적이 묻어있는 곳, 교복을 입은 어린 내가 살았던 곳, 하늘과 나무와 바람이 있는 곳, 그래서 언젠가 다시 돌아와 살고 싶은 곳.


오랜만에 간 춘천. 춘천을 떠난 후엔, 춘천 앞엔 언제나 '오랜만에'가 붙습니다. 좋아하는 언니랑 브이로그 찍어보겠다고 카메라를 가지고 와서는, 밀린 얘기 한다고 완전히 까먹은 날. 이 날은 언니가 제가 좋아하는 카페 포지티브즈 커피 한 모금 마시더니 엄지 척을 해줘서 뿌듯했던 날, 배가 터지게 점심과 저녁을 먹어놓고는 엽떡을 고민했던 밤, 함께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보고팠던 날, 오랜만에 행복했던 날입니다.


나에게 춘천은, 당신에게 춘천은, 우리에게 춘천은 그런 곳입니다.

우리의 이십 대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반짝이고 아름다운 우리의 도시.


* 함께 읽으면 좋은 글: https://brunch.co.kr/@romanticgrey/169






2019년 5월│부산


사람에겐 모두 시기란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입사  처음으로 월차라는  쓰고, 그것도 이틀이나  쓰고 부산에 갔습니다. 아직 1년도  되지 않은 신입사원은 쉬는   이렇게 불안한지. 저는 이유 없는 불안함을  스스로 만들어 유난인가 싶습니다. 무튼 끝나고 보니 짧은 부산 여행은 제게 나이스 타이밍이었습니다.  몸과 마음 리듬에 있어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있어서요.


엄마와 처음으로 둘이 떠난 여행. 저희 가족은 언제나 가족 여행을 즐기는 탓에, 이렇게 둘만 따로 '여행'이란 이름으로 떠나온 건 처음이었습니다. 차가 없는데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하루에 빗속을 만 오천 보나 걸었지만, 결론은 그래도 좋았다는 겁니다. 다시 한번 이번 여행은 엄마와 저의 관계에 있어, 또 각자에게 있어 아주 나이스 타이밍이었거든요.


이틀 내내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서로가 가진 두려움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했죠. 이렇게 나와 닮은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것도 다시 확인했고요. 그리고 제 인생에 있어 엄마와 가족이 얼마만큼의 무게를 차지하는지, 마음으로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엄마도 저도, 각자가 가진 어떤 삶의 무게를 조금 회복한 것 같다면 오버일까요?



태어나 이렇게 좋은 호텔, 그러니까 이렇게 값비싼 호텔은 처음이었습니다.(호텔을 결재하기 까지 얼마나 망설였는지,, 하지만) 엄마에게 여유로운 시간을 슬그머니 선물할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에 조금 뿌듯했습니다. 욕조  목욕 제품은  어떻고요.  맘먹고  입욕제가 몫을 톡톡히 했습니다.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도 했습니다. 물을 좋아하는 엄마는 애처럼 내내 웃었습니다. 물속을 인어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는 엄마 모습에 괜히 제가 기뻤습니다. 낯선 도시에 혼자 사는 외로움 따윈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달까요.


이상하게 저는 월급으로 위로받지 못합니다. 통장에 찍히는 숫자를 보고도 마음이  떨리지가 않아요.  돈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했을 , 작은 기쁨을 느낍니다. 돈의 위로가 이런 걸까요? 제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밤낮으로 일했지만, 여전히 자신의 티셔츠 하나도 사지 않는 아빠를 떠올렸습니다. 구두가 낡아 버려 중요한 자리에서 구두 밑창이 쩍 갈라져 검은 봉지를 감았다는 아빠의 어떤 날을 자주 돌아봤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주는 건 아까워 않고, 더 주지 못해 아쉬워하고, 줄 수 있어 기뻐하는 아빠를 생각했습니다. 아빠도 지금껏 이런 맘으로 살았을까 싶어 약간은 슬퍼졌고요.


이번엔 내 형편이 넉넉지 않아 호텔 조식은 신청을 못하고, 스타벅스 쿠폰으로 커피와 간단히 빵을 먹었습니다.(물론 맛있었습니다. 매우 즐겁게 먹었고요!) 하지만 언젠가 오늘처럼 폭우가 쏟아지는 날 호텔을 나오지 않고, 가족들 다 데리고 (조식 포함) 좋은 호텔에 올만큼 돈을 많이 벌겠노라 다짐했습니다. 태어나 처음 해본 호캉스, 사실 별 건 없었어요. 엄마랑 밥 먹고, 동네 구경하다가 수영하고. 그냥 엄마랑 있을 수 있어 행복했고, 엄마랑 나랑 행복할 수 있어 좋았고, 아무 걱정 없이 잠시 쉬어갈 수 있어서 행복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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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누군가의 마음


6월엔 여행을 가지 못했습니다.


6월에는 집 앞 공원에서 운동을 자주 했습니다. 혼자였다가 동네 분들과 모음을 만들어 함께였다가, 달렸다가 걸었다가 다시 달렸다가 줄넘기를 넘곤 했습니다. 아 춤도 췄고요.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몸으로 움직이는 무언가를 할 수 있어 기뻤던 6월입니다. 이마 위로 바람이 스칠 때 기분이 유난히 좋았던 것 같습니다.


6월엔 여행을 못 갔습니다. 마음이 바빠서 여행은 못 갈 거라고 생각했고, 생각처럼 저는 여행을 떠나지 못했죠. 그런데 6월의 마지막인 어느 날, 홀로 좋아하는 식당에 들러 좋아하는 가지 튀김을 먹는데, 좋아하는 사람들이 우연히 그 식당으로 와서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즐거웠고 행복했고 포근했어요.


그들과 한참을 웃고 떠들다 생각했죠.

6월, 저는 어쩌면 사람의 마음을 여행한 게 아닐까 하고요.


언젠가 제가 좋아하는 가지 튀김에 대해 이야기해볼게요.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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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여름휴가, 몽골


아주 오래 잊지 못할 겁니다. 여행 전 했던 걱정은 완전 시간 낭비였습니다. 돌아보니 온통 기쁨이었고 감사였고 행복이었음을, 바보 같은 나는 뒤돌아 아쉬움에 지난 우리의 시간만 곱씹고 있죠.


우리가 함께 나란히 앉아 노을을 본 날을 기억합니다. 하루의 마지막을 함께한 날을, 사랑에 대해 흠뻑 이야기 한 날을, 그렇게 숨어있던 감정을 꺼내 놓은 날을 기억합니다. 선명하고 아름다워서 나는 아주 오래 그날의 노을을 기억할 것 같습니다.




일상에 돌아와 자주 여행의 순간들을 떠올립니다. 문득문득 나는 행복했구나 싶어요. 행복의 기억을 안고 돌아온 일상은 전보다 풍부하고요. 그러니 우리 모두 행복하자,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자, 그리고 다시 모여 앉아 즐거웁게 또 떠나자- 말하고 싶습니다.


몽골에서 만난 여섯 명. 그들과 함께 한 10일. 다시 한국에 돌아가 각자의 일상 속으로 가겠지만, 돌아가서도 치열하게 아프고, 사랑하고, 살기를 끝나지 않은 초원을 보며 자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국에서 멋진 모습으로 만났을 때, 각자 잘 지냈다고 칭찬해 주자고도 생각했고요. 이쯤 되면 몽골 멤버 B가 여행 내내 유행시킨 그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 '언니 그러니까 우린 운명이라구!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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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9월│서울 한강, 마포


한강에서 자전거를 자주 탔습니다. 자주 홀로 걸었습니다. 서울 사람들이 왜 그렇게 한강을 좋아하는가 싶었는데, 밤의 한강을 처음 걸어보며 깨달았습니다. 밤의 한강, 강 건너로 도시의 불빛이 새벽까지 넘실거립니다. 늦게까지 재잘거리는 사람들의 온도가 느껴집니다.


여름밤, 한강, 마포. 자주 자전거를 탔습니다. 집에서 아주 먼 곳이었는데, 굳이 이곳에서 자전거를 탔습니다. 여름밤이 주는 환상과 밤의 한강이 주는 환상이 만나 제 속에서 축제를 이뤘습니다.




고향을 떠나 독립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제 삶은 많이 변했습니다. 회사는 딱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제 알을 깨뜨렸고, 단점을 직면하게 했죠.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며 자주 ‘지금’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서울의 대교도 걸어봤습니다. 오만가지 감정이 저를 스쳐 지나가더군요. 회사생활, 사회생활, 인간관계. 가라앉지 않기 위해 열심히 발을 굴리느라 자주 기운이 빠졌습니다. 그래도 프리랜서(?)를 하던 지난 몇 년보다 훨씬 더 많은 자극을 받고, 그 자극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게 몸으로 느껴졌습니다. 대교를 걸으며 조금은 낯 간지럽지만, 꼭 필요한 성장에 대한 고민을 했죠.


밤의 대교는 많은 감정을 선물해 줍니다.



마포의 카페도 자주 갔습니다. 가장 좋았던 카페는 엔트러사이트 서교점이었어요. 그 옆의 창비도, 당인리 발전소도 좋았어요. 글을 쓰러 자주 갔습니다. 집이 마포도 아닌데 자꾸 마포에 가서, 마포구 표류자라는 별명도 얻었죠. 마포가 왜 이렇게 좋았을까요.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 친구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언젠가 마포에서 살고 싶다는 오래된 친구의 말, 노을이 오래 머무는 곳 같아서 좋다는 말. 그 짧은 말에 제 마음이 온통 흔들렸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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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정동진



밤샘 기차를 타고 정동진에 갔습니다.


들리는 것이라곤 기차 소리, 밤 흐르는 소리, 곁에 있는 사람 소리뿐일 거란 제 로맨틱한 상상과는 정반대로 정동진 새벽기차는 사람으로 가득했습니다. 마치 김밥 옆구리가 누르면 툭 터질 것처럼, 새벽 기차는 시끄러웠고 복잡했습니다. 옆에 앉은 다보와 저는 당황해서 한 동안 어색한 웃음만 지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소리가 커질수록, 다보와 저는 가깝게 앉아 웃긴 얘기들을 했습니다. 옆구리 터진 김밥이 왜 더 맛있는지 아세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먹기 때문이죠.


막 도착한 정동진엔 별이 쏟아졌습니다. 가로등 불빛만 손으로 잠시 가리면, 서울 하늘에선 볼 수 없는 낭만이 맺혀 있었어요. 저는 제가 아는 유일한 별자리인 오리온자리와 북극 칠성을 찾아선, 다보에게 말해 주었죠. 몽골에서 쏟아지는 별을 보며 저 별을 꼭 다보에게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내가 아는 거라곤 고작 별자리 2개지만, 나는 저걸 네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하늘의 별들이 다 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정동진 역 건너편엔 24시간 하는 카페가 하나 있습니다. 아마 우리같은 일출 낭만객들을 위해 사장님은 밤을 지키나 봅니다. 카페가 이상하게 예전에 산장 미팅 같은 애정 프로그램을 한 곳을 닮기도, 재연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카페를 닮기도 해서 우리는 해가 뜰 때까지 열 가지가 넘는 상황을 상상하며 이야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지금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데, 그게 뭐라고 둘이 앉아 낄낄 웃으며 한참 수다를 떨었는지. 커피 맛은 그저 그랬는데, 이상하게 맛있게 느껴졌습니다.


 

저 멀리 여명이 밝아 옵니다. 우리는 서둘러 카페를 나섰습니다. 다보도 저도 길을 몰라 정동진 해변 입구를 헤매다가, 길을 지나던 동네 주민 분께 길을 물었습니다. 그 와중에 다보는 살 게 있다며 편의점에 갔고, 저는 부지런히 해변을 찾았습니다. 해가 저 멀리서 피어오릅니다. 아름답게. 아름다움에도 색이 있다면, 지금 제 눈 앞에 펼쳐진 바다와 하늘과 태양의 색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보와 저는 그 멋진 풍경을 보고 한 참을 감탄만 하며 바라보다가, 다보가 무겁게 가지고 온 삼각대를 꺼내 동영상과 사진을 남겼습니다. 유치하지만 얼마 남지 않은 2019년 무엇이 하고 싶은지 다보의 카메라에 대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앞서 얘기했죠? 옆구리 터진 김밥이 맛있는 이유와 맛없는 커피가 맛있는 이유를 요.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함께 본다는 건, 김밥과 커피에 비교할 것이 못 된다는 걸 다시 깨닫습니다.


다보와 바다에 서서 한참을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다보가 제 주머니에 뭔가을 쏙 넣어줬습니다. 따듯한 유자차. 이걸 사려고 다보는 편의점에 갔던 모양입니다. 따듯한 유자를 손끝으로 느끼며, 우리는 서로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눠 끼고 노래를 들었어요. 노래를 들으며 생각했죠. 우리의 아름다운 순간이 오래오래 가기를, 일상에 지치고 힘들어도 쉽게 포기하지 않기를, 적어도 서로가 서로에게 비겁해지는 일은 없기를, 각자의 부족한 점도 하나님이 돌보아 주시기를. 그리고 이 사람에게 내가 정말 좋은 사람이기를.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는 걸, 다보는 아마 영영 모를 거예요.


코 끝까지 쨍하게 추웠어요. 새벽 기차를 타고 올라와서 몸도 정신도 이미 하이 상태였고, 우리는 역 건너편에 있는 가게에 들어가 순두부를 먹었어요. 뜨끈하고 든든하게. 다보는 초당 순두부를 처음 먹어 본데요. 앞으로 다보를 데리고 세상 좋은 곳 전부 놀러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여행이 끝나고도 오래 정동진 바다와 정동진 바다를 바라보는 다보의 눈동자를 떠올랐어요. 그 장면을 떠올릴 때면 저는 다보가 전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졌죠. 그러면 다보가 제게 어제보다 오늘 더 조금씩 천천히 스며들고 있단 생각이 들면서, 지금 다보는 뭐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죠.


저는 이 날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이 날의 바다를, 이 날의 다보를, 이 날의 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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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구석구석 서울 여행


다보는 서울을 꽤 잘 압니다. 7년이나 서울에 살았던 저와는 비교도 안되게, 서울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얼굴을 잘 압니다. 그런 저를 이끌고 다보는 서울 산책을 시켜줬습니다. 다보와 함께 걷는 서울은 이상하죠, 지금껏 본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서울이 이렇게 예뻤던가요, 신기했던 가요. 11월은 이름 모를 조용한 골목을 걸었고, 서울 속 숨어있던 표정을 발견한 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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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대구 그리고 울산


대구에 내려갔습니다. 원래는 엄마 생신 선물로 여행 겸 연말 겸 여행을 가려고 했으나, 아빠를 두고 차마 발을 뗄 수 없었어요. 아빠가 1달 동안 아팠다며 뒤늦게 제가 소식을 전했습니다. 아빠 얼굴을 보니, 아빠는 몸도 마음도 아팠던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내겐 한 마디도 없구.


고향 집 식탁서 오랜만에 아빠랑 앉아 밥을 먹는데, 전에 보이지 않던 아빠의 눈가가 보였습니다. 젊고 튼튼했던 아빠의 시간이 언제 이렇게 지난 걸까. 왈칵 슬퍼져 밥 먹다 말고 덜컥 울었는데, 내가 우니 아빠가 따라 울었습니다. 엄마는 감성 모녀 또 시작이라며 옆에 휴지를 가져다주며 익숙하다는 듯 웃었습니다. 저랑 아빠는 울다 말고 엄마가 웃길래 엄마를 따라 웃었다. 킥킥하며, 너 콧물 흘렀다 하면서요.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모두 건강했으면. 영원히 젊고 건강했으면. 아프지 않았으면. 몸도 마음도 단단했으면. 한 해 한 해 지나며 점점 간절해집니다. 부모님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건 뭘까요. 몸에 좋은 음식을 사드리는 것, 자주 안부를 묻는 것.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봤지만, 그들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힘을 다해 행복하기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랑하면 그러니까요, 나보다 당신이 더 행복했으면 하니까요. 제가 부모님께 흐르는 시간을 멈춰줄 순 없으니까, 그들이 사랑하는 내가 건강하고 반드시 행복해야지 자주 생각하곤 합니다.



어느새 나이가 든 부모님의 얼굴을 살펴보다가, 우리 네 가족이 매일 함께였던 시절을 떠올립니다. 사실 혼자 나와 돈을 벌기 시작한 이후로는, 그 시절을 자주 생각합니다. 행복했던 기억과 동시에 제가 유년을 행복하게 기억할 수 있게끔 만들어 준 부모의 희생을 함께 떠올립니다. 그리고 제가 그들에게서 빼앗은 것은 젊음뿐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새기곤 합니다.


먼 곳은 못 가고 울산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바람결이 피부를 스칩니다. 남쪽이라 그런가 결이 참 따듯합니다. 맛있는 회를 잔뜩 먹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웃고 함께 걸었습니다. 작지만 거대한 행복과 산책하는 것 같던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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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28일 청민의 말:


시간이 성실히 흘러서, 2019년 마지막 토요일로 데리고 왔습니다.

내년에는 시간의 반의 반의 반만큼이라도 성실하게 살고 싶습니다.

올해의 단점을 깨고 나와 내년엔 작은 사자로 살고 싶습니다.


20대의 마지막 겨울을 보내고 있습니다. 10년이란 시간이 후딱 지나간 기분입니다.

시간을 잡을 수 없으니, 오늘 더 행복해 볼까 합니다.


2020년엔 2019년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


감사합니다.







청민 Chungmin
* mail   _ romanticgrey@gmail.com
* insta  _ @w.chungmin :여행/일상 계정
                 @chungmin.post : 컬처/브런치 알람(휴재 알람 공지 포함)/작가 계정

* Y-tube_ @청민 서랍장 : 2020년 open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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