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민 Sep 01. 2020

퇴근 후의 부라타 치즈 샐러드

#1. 어떤 마음은 훌쩍이고 어떤 마음은 뭉글해진, 어느 여름의 수요일


알 것 같다가도 여전히 모르겠는 회사에서의 나를 뒤로 하고 퇴근하는 길. 먹은 것도 없는데 입은 자꾸 텁텁했다. 산뜻한 음식이 먹고 싶었다. 입 속에 남은 무기력을 없앨 수 있을 만큼 아주 상큼하고 산뜻하고 생명력 넘치는 맛으로.



퇴근 후 집에 도착하자 마자 가방에서 식재료를 꺼내 정리했다. 어제밤 집으로 주문을 한다는 게, 회사로 주문한 삼순이. 부지런한 쿠팡 프레시 기사님께서 꼭두 새벽부터 회사 문앞에 박스를 쌓을 동안, 그것도 모르던 나는 침대에서 세상 편하게 자고 있었다. 쿠팡 프레시 로고가 대문짝만하게 찍힌 박스 옆에 적힌 내 이름 석자를 보며, 일찍 출근한 나의 상사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어젯밤의 실수 덕에 오늘의 나는 전속력으로 뛰어 출근했고, 컴퓨터만 급하게 켜둔 채로 문 앞에 탑처럼 쌓여 있는 쿠팡 프레시 박스를 챙겨 휴게실 구석에 가 박스를 뜯었다. 시킨 건 몇 개 되지도 않는데, 내 몸뚱이 만한 큰 박스 3개로 나뉘어 온 쿠팡 프레시. 구매자에게 프레시하기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프레시가 시들고 있을까 잠시 생각했지만, 그럴 새도 없이 모닝 커피를 마시려는 직원들이 휴게실로 몰려왔고, 나는 나름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박스 테이프를 벅벅 뜯곤, 챙겨온 작은 가방에 식재료를 대충 넣어선 회사 냉장고 깊은 곳에 넣어 두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퇴근 시간. 정신 없이 흘러간 하루에 혼이 쏙 빠져 회사 냉장고에 넣어 둔 식재료를 잊어버릴 뻔 했지만, 다행히 모니터 옆에 '식재료 챙기기' 메모해 둔 오전의 나 덕분에 무사히 식재료를 집까지 데리고 왔다. 나를 새벽부터 괴롭힌 친구들을 안전한 우리 집 냉장고로 옮겨 정리하고, 무엇을 먹을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오늘 열심히 도착한 로메인을 잡았다. 그래, 내게 지금 샐러드 만큼 좋은 게 없을 거니까. 재료만 댕강댕강 잘라서 그릇에 쏟은 다음, 소스만 뿌리면 되니까. 지금 나는 그 이상의 것을 해먹기엔 힘이 없었다. 그렇다고 라면을 먹고 싶진 않았고.




로메인 한 줌을 잘라 그릇에 담고, 삶은 계란을 올린다. 어제 밤 얼음 물에 담궈 매운 맛을 뺀 양파를 올리고, 대학 때 친했던 선배가 직접 농사를 지어 보내준 대추 토마토를 보기 좋게 썰어 올린다. 냉장고에 먹다 남은 체다와 파마산 치즈도 보기 좋게 슥슥 갈아 주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퇴근 후 차려먹는 직장인 식탁치고는 멋진데, 오늘같이 몸도 마음도 지친 날엔 조금 더 사치를 부리고 싶었다. 이번 주말 멋지게 차려 먹으려고 맘 크게 먹고 구매한, (그리고 오늘 아침 역시 나를 괴롭힌) 비싼 부라타 치즈를 뜯어 샐러드 한 가운데 올렸다. 오늘 나의 저녁상. 어딘가 엉성하고 어설픈데 푸릇푸릇하기만 한 게, 꼭 회사에서의 나 같다.


올리브유와 고향집에서 엄마 몰래 가지고 온 발사믹 식초를 슥슥 섞어 샐러드에 붓는다. 식초의 찌릿한 향이 코 끝을 잔뜩 찌른다. 젓가락으로 알록달록한 샐러드를 어기적 어기적 섞는다. 하나 쏙 빼어 먹으니 입안 가득 퍼지는 산뜻하고 상큼한 맛. 나를 괴롭히던 텁텁한 맛은, 차마 자기 주장이 강한 발사믹을 이기진 못했다. 처음 해보는 조합이라 이상할까 싶었는데 맛이 꽤 괜찮다.


괜찮은 직장인이 되고 싶다. 나한테만 맛있는 샐러드, 아니 '꽤 괜찮은' 샐러드가 아닌, 다른 이의 상에 올라가도 맛있는 샐러드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루치의 업무가 끝나고 집에 터벅터벅 걸어오며 자주 생각한다. 착착 자기일을 재빠르게 처리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되고 싶다고. 모르면 자꾸 입이 마르게 되고, 모르면 뭔가를 놓치게 되고, 몰라서 놓친 게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도 하니까.


시큼하고 달달하고 그래서 맛있는 퇴근 후 샐러드를 먹으며 생각한다. '직장인'이란 이름을 가진 지 이제 1년하고 반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회사를 잘 모르겠다고. 회사에서 내 모습도 잘 모르겠다고. 매일 주어진 몫을 열심히 해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잘 해내고 있는지 모르겠어서 자주 모니터 앞에서 숨이 턱턱 막힌다.


나는야 2년차 직장인. 더 이상 신입사원이라고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능숙하다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위치. 여기저기 눈치는 많이 보지만, 정작 중요한 눈치는 못 채고 있는 걸 아는 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서 답답한 날들이다. 사실 오늘 회사에서 큰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텁텁하고 턱턱하고 툭툭한 날. 매일 하루는 똑같이 흘러가는데, 나는 매일 서툴고 몰라서 어렵다.


그런 내게 필요한 건 샐러드 한 접시. 내 마음을 잠시 녹이고, 다시 내일 출근을 할 수 있는 기분으로 되돌려 줄만큼의 상큼함을 채운다. 이렇게 나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간다. 언젠가 꼭 되고 싶었고, 꿈꾸었던, 하루하루를 버티는 돈을 버는 어른이. 이렇게 어려운 건지도 모르고 나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떤 마음은 훌쩍이고, 어떤 마음은 뭉글해진 어느 여름의 수요일. 나는 샐러드 한 접시를 먹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